
- 언론의 무능함과 타락을 걱정하기 전에 할 일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종종 장르는 그 장르를 잉태한 시대를 넘어서서 살아남는다. 서부극만 해도 이 장르의 무대가 된 시대는 비교적 짧게 끝났지만 영화 장르는 20세기 중반까지 대유행이었다. 겨우 6년 동안 지속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역시 하나의 장르이며 아직도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야기가 충분히 매력적이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사라진 직업과 사라진 공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박인제의 [모비딕]을 보면서 위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 영화의 무대는 1994년이다. 감독에 따르면 영화의 모델이 된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에 맞추고 싶었다던데, 그건 90년이니 그래도 완벽한 설명은 되어주지 못한다. 이보다 더 이치에 맞는 설명이 따로 있으니, 만약 현대 무대로 음모론을 파헤치는 정의의 주인공을 신문기자로 설정했다면 관객들은 그냥 믿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더 이상 신문기자는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블로거나 트위터 사용자가 더 그럴싸하지 않으려나. 정 신문기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면 그를 과거로 보내야 한다. 카우보이 주인공을 서부극 시대 배경 안에 묶어두는 것처럼.
러셀 크로우가 나오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현대 배경으로 신문기자를 내세운 준수한 스릴러지만, 이 영화 역시 시대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 신문기자의 파트너는 인기 블로거이고 기자들은 신문사를 집어삼킨 미디어 재벌의 눈치를 봐야 한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 칼은 어떻게든 당시의 위엄을 찾고 싶어하는 모양이지만, 과연 이것이 언제까지 가려나.
언젠가 할리우드도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셜록 홈즈식 명탐정이나 서부극 카우보이, 중세극의 기사처럼 고풍스러운 직업으로 여기고 시대극에나 쓸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신문기자 하면 현대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은 [히스 걸 프라이데이]에 나오는 로잘린드 러셀과 캐리 그랜트다.
다음에는 뭐가 올까? 모르겠다.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를 지켜보며 느꼈던 건데, 이런 식으로 버틴다면 주류 언론은 결코 대안이 못 되겠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나. 권위는 없어진지 오래고 정확성도 떨어지며 억지로 여론을 만들 힘도 없다. 사람들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거나 신문을 보는 대신 트위터를 찾는다. 그게 더 빠르고 정확하니까. 주류언론이 하는 건 뒤늦게 트위터를 따라가는 것뿐인데, 이번엔 그것도 잘 안 하더라.
여기서 주류언론의 무능함과 타락을 걱정하는 건 나의 일이 아니다. 나는 SF를 쓰는 게 직업이니, 현재를 한탄하는 것보다 미래를 예측하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과 같다면 아마 대형 신문이나 공중파 텔레비전이 권위있는 뉴스 매체로 존재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블로거와 같은 작은 언론 단위가 이합집산하며 만들어내는 뉴스 생태계가 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
직접적인 취재 없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에 이미 존재하는 정보들을 종합하고 분석하는 사용자들이 지금의 주류 언론이 잃어버리고 있는 권위를 대신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그밖에도 다양한 가능성들이 있을 거다. 아마 최종적으로 나오는 건 우리가 차마 상상도 못했던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크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SF 작가들이라고 나을 건 없다. 움베르토 에코와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책의 우주]에서 언급했지만 SF작가들 중 어느 누구가 플라스틱을 예언했던가.
그러나 미래를 예언하려 노력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당장 정답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노력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주류 언론이 존재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 정보화 시대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변화기의 과정을 다른 나라보다 조금씩 일찍 겪었다. 아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건 죽어가는 동물의 마지막 발악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혼란스럽고 아프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미래의 다른 가능성을 봐야 한다. 그 동물의 시체에 깔려 발버둥치다 함께 죽어가고 싶지 않다면.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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