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지털 시대를 의심하게 만드는 징후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지금은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한참 진행 중.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들 대부분은 조금씩 실망스러웠는데, 아마 그건 영화제 전체를 반영한다기보다는 그냥 운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이번 영화제 [붉은 모란] 회고전과 관련된 문제는 운과는 별 상관없다. 이 회고전에 출품된 일곱 편의 영화 중 네 편이 HD 디지털 복원판인데, 아무도 디지털 원본의 비스타 비율 화면을 원래의 스코프 비율로 바꾸는 방법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 때문에 이 영화들은 모두 화면이 위아래로 길쭉하게 늘어난 채 상영되고 있다. 내 기준에 따르면 이건 영사 사고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곰 플레이어나 흔한 DVD 플레이어도 할 수 있는 것을 극장에서 하지 못해 왜곡된 화면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은.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담당자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 불가능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람들은 진짜 그게 별다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까지 공지가 올라와 있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붉은 모란] 소동은 디지털 시대를 의심하게 하는 여러 징후 중 하나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디지털 매체가 같은 작품을 더 좋은 환경에서 더 편하게 볼 수 있게 돕는 통로라고 믿었다.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우린 텔레비전과 케이블에서 HD급 화질로 영화를 보고 VOD도 가능해졌고 블루레이도 나왔으며... 하지만 이상하게도 AV팬들이 꿈꾸던 한 방향의 질적 향상은 오지 않은 것 같다. 이 매체들은 묘하게 불편하다. 블루레이 플레이어는 끊임없는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해도 계속 디스크와 다양한 충돌을 일으키고, 온라인에서 다운로드 받는 파일들은 말이 HD화면일 뿐 종종 화면비율이 망가져 있거나 화질과 음질 깨져 있다. VOD도 말이 HD급일 뿐 기준에 못 미치며 DRM이 깔린 파일과 씨름하다보면 과연 내가 이 파일의 주인이긴 한 건가,하고 의심하게 된다. 뭔가 나아지긴 했는데, 질적 향상보다 불편함과 대충한다는 의심이 더 많아지고, 사람들은 또 그걸 당연시 하는 거다.
비슷한 경우는 전자책이라는 새 매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이 매체에서 완벽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시작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 동안 전자잉크 책과 아이패드 앱으로 다양한 책들을 시도하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는 이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전자책 서비스 상당수는 자신의 작업에 아주 낮은 기준을 세워놓고 그에 만족하는 것 같다.
문장 부호는 단어 끝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아 종종 다음 행으로 밀리며 들여 쓰기는 대부분 포기해버린다. 오타와 띄어쓰기 실수는 전환 과정 중 당연히 일어나는 실수다. 독자들은 이런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견뎌야 한다. 하지만 내 짧은 생각에 따르면 책은 견뎌야 하는 게 아니다. 지금 기술로는 이 정도밖에 못하니 이것만 해야지, 하고 만족할 단계는 아니란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매체의 장점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자들은 너무 온순하고 너무 쉽게 만족하고 너무 불평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낮은 기준을 세워놓고 대충 일하게 된다. 하긴 지하철에서 화면 왜곡된 영상 파일을 PMP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대부분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차릴 능력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연예인 사진을 품평하며 포토샵으로 늘렸네, 어쩌구 하고 있는 것이니 웃을 수밖에.
-- 이 글은 17일 자정 무렵에 쓰여졌다. 18일부터 [붉은 모란] HD 영화들은 화면 보정이 된 상태로 상영되고 있고 이에 대한 공지도 올라왔다. 주말에 왜곡된 비율로 상영되었던 [여자 야쿠자]와 [화투 승부]는 제대로 된 비율로 볼 기회가 한 번씩 더 남아 있다. 내가 트위터로 이들을 귀찮게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을 귀찮게만 한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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