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올해 부천에서 나는 두 편의 파운디 푸티지 영화를 보았다. [트롤 사냥꾼]과 [시체스 별장의 공포]. [트롤 사냥꾼]은 다소 나른한 상태로 보았지만 다 보고 나니 썩 마음에 드는 영화였고, [시체스 별장의 공포]는 러닝타임 내내 집중해서 보기는 했지만 [트롤 사냥꾼]만큼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재미있어하며 보는 것만으로 영화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파운드 푸티지가 무엇인가. 원래 이는 감독이 직접 만들지 않은 푸티지를 편집해 새로운 내용으로 만든 작품들을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요새는 [블레어 윗치] 스타일의 모큐멘터리 영화에 더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주인공들이 찍은 푸티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려졌다가 재발견되었는데, 그걸 편집해서 극장에서 다시 튼다는 식이다. 특히 호러물에서 이런 내용의 작품들이 많다. 앞에서 예를 든 영화들 말고도 [카니발 홀로코스트], [파라노말 액티비티], [라스트 엑소시스트], [클로버필드]와 같은 영화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에 이 수법을 이용한 [흉가]라는 영화가 나왔었다. 실패작이었지만.

[블레어 윗치] 이후, 이 장르는 늘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블레어 윗치]라는 영화 자체가 인터넷 하이프의 대표 사례로 찍힌 데다가 (나는 여전히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장르 영화들이 늘 잔재주로 한 몫을 챙기려는 싸구려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그 중엔 썩 좋은 영화들도 있다.

이 장르에서 가장 매혹적인 점은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모큐멘터리 영화들은 대부분 아주 어색한 상황을 그린다. [블레어 윗치]를 보라. 세 배우 중 한 명이나 두 명이 카메라를 잡아야 하고 한 명은 음향 담당이다. 이런 구차스러운 짐을 챙겨들고 영화 끝까지 가야 하는 거다. [시체스 별장의 공포]는 더 어색하다. 도대체 왜 저 남매는 자기가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까지 카메라로 찍는 걸까? 도시를 때려 부수는 거대한 괴물이 쫓아오는데 끝까지 캠코더를 놓지 않는 [클로버필드]의 등장인물은 어떤가. 그리고 이 장르 영화는 언제까지 이렇게 어지럽게 흔들려야 하나. 멀미가 난다.

그러나 이 어색한 상황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이제 [블레어 윗치]와 같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굳이 전문가용 장비를 챙길 필요 없다. 동영상 촬영 기능이 있는 휴대 전화로 충분하다. 지금 상황이라면 오로지 주인공들이 휴대 전화로 찍는 동영상만을 편집하기만 해도 장편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상황은 더 개선될 것이다. 다시 말해 굳이 억지로 카메라를 끌고 다니는 설정을 넣지 않아도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설명되는 파운드 푸티지 영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흔들리는 카메라 역시 가까운 시일 내에 소프트웨어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와는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영화관 스크린과 모니터가 영상 매체의 유일한 전달 수단으로 남을까. 다시 말해 꼭 파운드 푸티지라는 장르 형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주인공 시점의 영화를 더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건 보기보다 무서운 이야기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람의 눈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시선으로 존재했다. 아무리 사람의 시선을 모방한다고 해도 카메라는 여전히 독립적인 기계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영화만의 독자적인 성격을 만들었다. 대부분 예술이 그렇다. 하지만 지금 카메라와 사람 눈 사이를 막는 기계의 막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지금의 막이 결국 깨지면 그 다음은 무엇이 찾아올까? 그걸 가장 먼저 암시하고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파운드 푸티지 영화들이다. 어지럽고 조잡한 거짓말이라고 해도, 이 영화들은 영화의 가능한 미래를 보여준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블레어 윗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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