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백보다 성충, 흥수가 더 돋보이는 이유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드라마 공감] '계백'의 스토리는 가잠성 전투에서 도성으로 옮겨지면서 훨씬 나아졌다. 어색한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보다 차라리 세치 혀로 움직이는 정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두 인물이 있다. 하나는 계백과 가잠성 전투에서 생구로 잡혀 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성충(전노민)이고, 또 하나는 가잠성 전투의 공적을 치하하는 과정에서 모든 귀족들이 교기(진태현)의 공이 더 크다 했지만 이를 혼자 반대하며 의자(조재현)에게 초헌관을 건넨 흥수(김유석)다.

이들은 짧은 출연에도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꿰뚫어보는 듯 허를 찌르는 언변과 뛰어난 책략은 그 어떤 전투 장면보다 이들 캐릭터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가잠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생구들에게 포상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반란에 연루된 계백(이서진)이 성충과 기지를 발휘해 밖에서 호응해주는 흥수의 도움으로 생구들을 모두 탈출시키는 이야기는 액션과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이지만 계백과 함께 성충, 흥수는 백제의 3대 충신으로 일컬어진다. 그만큼 이 사극의 중심인물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계백이다. 계백의 존재감은 가잠성에서의 야수 같은 모습 이후에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버지를 칼로 찌른 의자에 대한 막연한 증오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계백은 복수를 포기한다. 또 복수의 칼날을 사택비(오연수)에게 겨누지만 이것 역시 은고(송지효)와 의자에 의해 만류된다. 사택비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조정을 쥐고 흔드는 사택비 가문 전체를 무너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계백은 이 과정에서 마치 어린 아이 같은 인물이 되어버렸다. 마치 앞뒤 사리 분간 없이 보채기만 하는 그런 인물.

물론 이것은 하나의 성장과정일 것이다. 싸우는 것만 잘 할 줄 알았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또 어떻게 싸워야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인지 아직까지 계백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좌충우돌형 미성숙한 인물을 보좌해줄 성충이나 흥수, 혹은 은고 같은 '두뇌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계백은 결국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게 '계백'이라는 사극이 궁극적으로 그리려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계백이 소명을 발견하는 그 시점도 중요하다. 이미 극이 시작된 지 13회가 지났지만 계백이 앞으로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초반 기선을 잡아야 하는 사극으로서는 잘못된 전략이다. 계백은 결국 황산벌 전투에서 죽는 인물이다. 그러니 전쟁의 승리나 삼국의 통일 같은 스스로 밝히지 않아도 저절로 목표가 읽히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즉 계백은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 선덕여왕도 아니란 얘기다.

따라서 결국 죽음을 향해 장렬히 달려가는 계백이 꿈꿀만한 웅대한 개인적인 소명이 밝혀져야 한다. 이것은 사극이 극을 전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죽더라도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계백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이미 초반부에 그 꿈을 슬쩍 보여줬어야 한다. 명쾌한 목표설정은 영웅의 성장담을 다루는 스토리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앞부분에 명백하게 던져질수록 시청자들은 목표를 향해 하나하나 미션을 헤쳐 나가는 계백의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계백'이라는 사극에 정작 계백이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건 아직까지 시청자들이 그가 꿈꾸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죽은 아버지 무진(차인표)의 그림자 아래서 방황하고 은고와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있을 뿐이다. 성충과 흥수의 등장은 흥미롭지만 그들은 이 사극 전체를 끌고 가는 주인공이 아니다. 계백 자신의 욕망이 전면에 드러나야 한다. 이제 그 때가 다 되었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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