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영화, 미드의 세계를 그대로 따라야 하나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어렸을 때, 나는 영국 경찰 시스템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경찰 계급의 순서를 정확하게 암기할 수 있었고, 경찰청의 높은 양반들 중 어디까지가 진짜 경찰인지도 알았다. 범죄수사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알았고, 심지어 새 청사로 옮기기 전 뉴 스코틀랜드 야드의 주소까지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여러분은 내가 어린 시절 영국 추리소설 애독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모든 건 현실세계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이 무대인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의 소설을 읽을 때는 큰 도움이 된다.

영화와 현대 미국 추리소설로 관심이 넓어지면서 나는 현대 미국 경찰 체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을 쌓게 된다. 하지만 내 지식은 이 영역에서 그리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마이클 코널리의 추리소설을 무리 없이 읽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로앤오더] 시리즈의 열혈 시청자들은 이에 대해 나보다 훨씬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을 테니 말이다. 컴퓨터로 신작 에피소드를 실시간으로 다운받으며 메시지 보드에서 의견을 나누고 자막을 번역하는 미드 팬들이 가진 미국 사법체계에 대한 지식은 결코 얕잡을 수준이 아니다. 그렇다고 드라마에 나오는 걸 모두 믿어버리면 곤란하겠지만. 나 역시 영국 경찰청 역사에 민간인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은 기록이 단 한 건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이 흡수하는 정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들은 우리에게 제2의 경험을 제공해주는 유용한 통로이다. 보통 그것은 연하의 잘생긴 본부장이 평범한 아줌마와 사랑에 빠지는 식의 판타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라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진짜 세계의 일부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이건, 우리는 그들을 통해 세상에 대한 상을 만든다.

단지, 이게 좀 괴상해질 때가 있다. 얼마 전에 나는 하정우, 박희순, 장혁이 나오는 법정 스릴러인 [의뢰인]의 시사회를 보러 갔다. 시사회가 끝나고 간담회가 있었는데,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다. 그게 뭔지는 말하지 못하겠다. 스포일러니까. 하지만 그 기자가 변호사의 특정 행위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는 정도는 말해도 될 것 같다. 곧 감독의 답변이 돌아온다. “미국에서는 문제가 되겠지만,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대요.”

여기서부터 나는 스스로가 민망해진다. 과연 나는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암만 생각해도 내 지식에 대해 확신이 안 선다. 내가 그리는 법률가의 이미지라는 것들은 대부분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담회에서 기자들이 질문하는 걸 들어보니,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들 역시 한국 변호사들보다 미국 변호사들에 대해 훨씬 더 잘 안다.

그렇다고 [의뢰인]이 그 지식을 교정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으니, 영화의 법정 묘사는 재미를 위해 약간 미국화 시킨 공간인 모양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허구의 예술 작품을 통해 한국 법정의 모습을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접한 작품으로는 뭐가 있던가? 소설로는 손아람의 [소수의견]을 읽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이외의 작품을 떠올리자니 내가 보지 못한 몇몇 드라마와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옛날 영화들 제목만 굴러들어온다. 아, 최은희와 김지미가 나왔던 [겨울부인]이라는 옛날 영화도 기억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추천해줄 수는 없으니, 이 영화에 나오는 법정 장면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괴상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우리에게 제2의 경험을 제공해주는 통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그 통로가 어느 방향으로 열려 있고, 어디가 막혀 있으며, 어디가 잘못 뚫려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온갖 전문가 시리즈가 판을 치는 미드의 세계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한 판타지의 세계를 반복해 그리는 작가들이라도 보다 다양한 현실 세계를 반영하며 간접 경험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의무감은 필요하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의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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