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과 허구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미성년자 배우에게 연기란 놀이일 수도 있지만 정신과 육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중노동이거나 학대일 수도 있다. 당연히 이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르콩트가 감독한 [여행자]를 보신 적 있는지 모르겠다 (안 보셨다면 보시라. 어린이를 다룬 가장 아름다운 한국영화 중 하나이다.) 이 장면에는 주인공 소녀가 손으로 무덤을 파 그 안에 잠시 동안 자신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르콩트는 이 상징적인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심리치료사를 부른다. 그러니까 르콩트에게는 여기서부터가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빌어야 할 단계였던 거다. ‘선진국’ 운운하며 이야기를 풀긴 싫지만, 이로써 우리는 프랑스인인 르콩트의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우리나라 평균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일상적인 드라마 촬영환경 속에서 이 정도 장면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을 테니까.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에는 더 끔찍한 장면들이 나온다. 세 명의 미성년자 아이들이 청각장애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에 의해 성폭행 당한다. 황동혁 역시 이 장면을 어른배우들과 일할 때처럼 그냥 찍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배우의 부모들이 늘 현장에 있었고, 몇몇 위험한 장면들에는 편집과 대역이 동원된다. 나는 실제 영화 촬영 환경이 화면에 보이는 것만큼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걸 고려한다고 해도 몇몇 장면들은 여전히 ‘이게 올바른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적 효과가 좋고 촬영장에서 충분한 보호 장치가 있다고 해도, 관객들이 영화의 캐릭터가 아닌 출연한 미성년자 배우들을 걱정하는 단계까지 도달한다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도가니]보다 더 걱정스러운 촬영현장이 있었다. 9월 26일, 나경원 의원이 중증장애인 시절 ‘가브리엘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겉보기에 그것은 봉사활동이지만, 선거에 출마한 정치가들이 그런 시설에 방문을 할 때는 그것은 이미지를 위한 하나의 쇼 이상은 아니다. 시설의 장애인, 정치가, 운영자, 기자들이 배우, 감독, 촬영감독 역할을 하며 이 쇼에 참여한다. 당사자들에겐 귀찮고 불편할 뿐인 것으로 생각했던 이 행사는 나경원 의원이 중증장애를 가진 남학생의 알몸목욕하는 장면을 공개하는 순간 인권문제로 전환된다.

이 장면을 [도가니] 촬영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 결과가 어떻게 보이건, [도가니] 촬영은 출연자의 상태를 끊임없이 걱정하는 가족들과 전문가들이 있는 통제된 환경에서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 상황은 기본적으로 허구였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집에서 나경원 의원이 벌인 쇼에서 현실은 허구와 가장 끔찍한 비율로 만난다. 조명장치까지 갖춘 완벽한 스튜디오 안에 들어온 그 남학생은 허구의 인물을 연기하러 카메라 앞에 선 게 아니다.

이 소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무조건 악당으로 몰아갈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렇다면 일은 손쉬울 것이다. 가브리엘의 집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는 악의가 아닌 기계적인 무심함과 무관심함 속에서 벌어졌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이나 뒤에 선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학생의 인권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나경원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위한 소도구이자 엑스트라였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 소동이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의 결여이다. 정치가들의 시설 방문이 이미지 구축을 위한 쇼라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이런 쇼를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찍듯 프로페셔널하게 접근하지 않는가. 이게 진짜 드라마였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출연자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배려했을 것이고, 촬영 현장을 보다 꼼꼼하게 통제했을 것이다. 물론 당연히 당사자의 동의도 얻었겠지. 하지만 이 쇼가 현실이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은 그런 당연한 과정을 거치는 걸 깜빡 잊어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연기는 자신과 캐릭터를 구별할 수 없는 몰아의 상태에서 만들어진다는 착각을 품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훌륭한 전문 배우들은 아무리 캐릭터와 상황에 몰입해 있다고 해도, 연기하는 내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느 단계까지는 알고 있다. 배우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까지 간다면 그건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건 연기가 아닌 뭔가 괴상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순수예술의 경우엔 이 괴상한 것도 재료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정치가들의 시설 방문은 순수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예비군 교육 영화처럼 실용예술이다. 그리고 실용예술에는 실용예술에 맞는 프로페셔널한 접근법이 있다. 다들 짜고 치는 고스톱인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어줍지 않은 몰입을 하며 현실과 허구를 착각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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