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영화 몰락의 원인들, 한국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문원의 문화산업비평] 근래 세계 영화계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현상은 바로 아시아 영화의 ‘독립’ 상황이다. 한국, 일본, 태국 등 아시아 국가 영화산업은 21세기 들어 신기하게도 하나둘 할리우드 영화의 압제와 주박에서 풀려나왔다. 그러면서 탄탄한 자국영화 시장을 구축했고, 마침내 자국영화 시장점유율이 50%대를 넘어서는 쾌거를 속속 달성했다.

그러나 이 같은 범 아시아적 ‘독립 무드’에 동참하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1980년대 아시아 영화산업의 맹주로까지 불렸던 홍콩이다. 홍콩은 현재 영화시장이 붕괴직전까지 간 상태다. 전성기였던 1993년 한 해 동안 무려 242편의 영화를 쏟아냈던 홍콩영화산업은 현재 기껏해야 40~50여 편만을 내놓고 있다. 무려 6분의1 감소다.

흥행수익 역시 전성기 시절 10억 홍콩달러를 넘나들었지만 현재는 마찬가지로 6분의1 감소가 이뤄졌고, 평균입장료가 전성기 시절보다 67% 증가한 상황에 비춰보면 관람객 수는 그보다도 더 크게 준 상황이다. 한 해 흥행 베스트 10 전체가 홍콩영화들로 채워졌던 영광의 시절은 끝나고, 지난 2010년을 돌아보면, 흥행 베스트 10 내 홍콩영화는 히트작 속편 ‘엽문 2’와 전형적인 하세편(賀歲片) ‘72 가조객’ 2편뿐이다. 더군다나 1, 2위도 아닌 5위와 6위다. 이쯤 되면 가히 ‘몰락’이라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다.

그 어마어마했던 홍콩영화산업이 어쩌다 이처럼 참담한 몰골이 돼버린 걸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신문, 방송 등 각종 미디어가 지난 십 수 년 간 지적해온 바 있다. 요지를 정리하자면, 홍콩영화계는 히트작 속편들과 비슷비슷한 아류작들, 그리고 싸구려 코미디들만 만드는 등 얕은 상술을 부린 탓에 관객들로부터 외면 받고 패망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꽤나 일반적으로 퍼졌다. 실제로 ‘홍콩영화’ 항목에 게재된 한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 내용 역시 이렇게 기술돼있다.

“장르의 유행에 민감했던 홍콩 영화는 유사한 종류의 이야기와 스타를 ‘착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홍콩 영화의 생명력을 단축시켰다. 홍콩 영화는 나태해지고 자족적으로 변했으며 점점 과거의 창의력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히트한 이야기를 조금만 바꿔 같은 배우를 내세워 찍는 영화들이 활개쳤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위 내용도 분명 홍콩영화 몰락에 일조한 부분이다. 그러나 위 현상은 홍콩영화 몰락의 후기증세일 뿐 그 원인이라 보긴 힘들다.

여기서 그 원인을 따로 짚어 한 발짝 더 나가면, 1997년 홍콩 반환이라는 테마로 접어들게 된다. 방송 등에서는 딱히 거론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학계나 경제계의 여타 분석 자료들을 보면 이를 짚는 것들이 많다. 1997년 홍콩 반환과 맞물려 홍콩 내 각종 투자가 얼어붙게 되고, 그에 따라 고급인력들이 해외 방출되는 현상을 겪었으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산업도 타격을 받아 싸구려 코미디, 히트작 아류작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홍콩 반환 이후 중국 정부의 ‘정치적 간섭’에 의해 영화종사자들 창작력에 한계가 닥쳤다는, 가히 도시전설 격 원인이 추가로 붙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그 근거가 되는 사건이나 현상 한 두 개 쯤은 쥐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완벽한 분석이라 보기엔 무리가 많다.

홍콩영화 몰락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간명하고 절대적인 원인과 그에 따른 분명한 현상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타무라 요타로의 베스트셀러 ‘실패학의 법칙’은, 대형 참사 등 하나의 거대한 실패가 탄생되기 위해서는 수십 가지 작은 실패들이 마치 작전이라도 짠 것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져야만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홍콩영화산업도 마찬가지다. 너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마치 작전이라도 짠 것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져 몰락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거의 운명적이라는 인상까지 들 정도다. 이를 하나씩 풀어보자.



불법복제 VCD에 의해 초토화 된 1990년대

홍콩영화의 최전성기는 대략 1992~93년경으로 파악된다. 1992년은 홍콩영화산업 전체에서 자국영화 점유율이 무려 80%대를 넘어섰던 ‘점유율 1위’의 해였고, 1993년은 앞서 언급했듯 영화제작편수와 흥행수익 면에서 최고조였던 해다.

그러던 것이 불과 수년 만에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1993년을 기점으로 영화제작편수는 매년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당연히 흥행수익 감소에 있었다. 그러다 1996년에 이르자 자국영화 점유율까지 40%대로 급락, 전성기 시절 분위기는 완전히 휘발돼버렸다. 그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자국영화 점유율이 50%를 넘어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짧은 기간 내 대체 어떤 요소가 홍콩영화시장을 이토록 엄청나게 뒤흔들어 놓은 걸까. 바로 불법복제 시장의 확대다. VCD 등을 총해 1990년대 초반부터 이뤄진 영화불법복제는 정확히 1992~93년을 기점으로 어마어마하게 확장됐다. 심지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바로 앞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상영 중인 영화 VCD를 팔기까지 했다. 가격은 10~20홍콩달러 정도로, 당시 극장입장료 30홍콩달러에 비해 절반 수준이었다. 거기다 화질까지 나쁘지 않았다. 거의 정품에 가까운 화질을 보유하고 있었고, 때로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 고화질의 불법복제 VCD가 나돌기까지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그리고 홍콩 당국은 어째서 이를 제대로 막아 세우지 못한 걸까. VCD 불법복제 시장 뒤엔 홍콩 범죄조직 삼합회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홍콩 반환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건 정상적 실업계뿐만이 아니었다. 삼합회 역시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반환을 불과 4~5년 앞둔 시점, 짧은 기간 내 여유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흥하고 있는 영화산업을 갉아먹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처럼 홍콩 지하경제 전체를 쥐고 흔드는 조직이 영화 불법복제 시장에 나섰으니 이를 제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저 노골적인 리어카들을 적발하는 수준에 그쳤을 뿐 근본적 해결책이 나오지는 못했다. 홍콩 반환 이후인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홍콩 관행부서가 17개 VCD 해적판 제작공장을 폐사키시고 73개 생산라인을 몰수하는 등 강력한 조치에 들어갔지만, 당시는 이미 때가 늦었다. 홍콩영화산업은 그 짧은 기간 동안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어 있었다.



코미디 영화 유행으로 ‘극장 관람’ 메리트 감소

여기서 왜 유난히 홍콩영화만 타격을 받아 자국영화 점유율이 떨어지게 됐느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삼합회 역시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외영화를 복제하면 바로 미국 등 해외에서 클레임이 들어오게 된다. 이는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돼 아무리 홍콩 지하경제를 주름잡는 삼합회더라도 일정 부분 타격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런 리스크를 감당하느니, 차라리 홍콩영화만을 중점적으로 불법복제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는 것이다. 어차피 삼합회는 홍콩 대중문화산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 불법유통을 시키더라도 일정부분 상황을 무마시킬 영향력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해외영화,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의 경우 아무리 고화질 불법복제 VCD가 나돌더라도 충분히 극장흥행에 메리트가 있었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할리우드는 직배 시스템 등을 통한 자신감으로 영화 제작규모를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부풀려 놓았다. 1991년 ‘터미네이터 2’가 최초로 제작비 1억 달러를 돌파했고, 몇 년이 지나자 1억 달러는 웬만한 블록버스터라면 ‘기본적으로’ 감당해야할 제작비가 돼버렸다. 그렇게 부풀려진 제작비로 할리우드는 비좁은 TV 화면으로는 제 맛이 나지 않는, 극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만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영상쾌락을 제공했다. 한 마디로, ‘쥬라기 공원’ 정도 영화라면 아무리 싼값에 고화질 VCD를 구입할 수 있더라도 극장에서 관람코자 하는 관객층이 더 폭넓게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콩영화는? 홍콩영화도 물론 1980년대에는 그런 메리트를 내세울 수 있었다. 신예성 영화사 등이 시도한 ‘영웅본색’ 등 하드액션, ‘천녀유혼’ 등 시대극 판타지, ‘철갑무적’ 등 로봇SF 등 다양한 장르 영화들은 충분히 ‘극장에서 보는 게 더 나은’ 감흥을 관객에게 안겨줄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는 달랐다.

1990년대는 코미디의 시대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각종 다양한 장르영화들을 여유롭게 소비하던 홍콩인들이지만, 막상 홍콩 반환이 수년 앞으로 다가오자 전반적 정서와 그에 따른 영화 취향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현실적 불안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는 가벼운 코미디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정확히 반영하는 예가 바로 배우 주성치의 1990년대 최고스타 등극이다. 난장판 코미디 대가인 주성치는 홍콩영화 최전성기인 1992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심사관’ ‘가유희사’ ‘녹정기’ ‘무장원 소걸아’ ‘녹정기 2: 신룡교’ 등을 통해 1992년 통산 박스오피스 1위부터 5위까지를 모두 자신의 영화들로 채워낸 것. 그밖에 ‘도학위룡 2’를 11위에, ‘신정무문 2’를 14위에 랭크시켜 15위권 내 자신이 1년 동안 출연한 7편의 영화를 모두 포진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홍콩 관객들은 주성치 영화에만 몰두한 건 아니었다. 당장 1992년만 해도 허관문의 ‘신산’, 양가휘의 ‘92 흑장미 대 흑장미’ 등 코미디 대히트작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1990년대 초중반 동안 홍콩영화계에선 ‘신반근팔냥’ ‘길성고조’ ‘대부지가’ 등 코미디 대세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렇듯 관객이 미친 듯이 열광하고 있으니 홍콩영화산업 전체가 가벼운 코미디 중심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막상 불법복제 VCD가 횡횡할 때 딱히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인 메리트를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품 코미디는 극장에서 보나 집에서 TV로 보나 그 감흥에 있어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2년 주성치 러쉬가 일어난 바로 다음해인 1993년, 홍콩영화계는 한 해 통산 흥행 1위 자리를 ‘쥬라기 공원’에 내줘 무려 16년 간 지속되던 자국영화 연속 1위 기록을 스스로 깨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진정한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운명처럼 벌어진 할리우드 대거 인력 수출

이처럼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이 연속되고 있는데,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자 엎친 데 덮친 격 상황이 또 하나 등장했다. 바로 홍콩영화인들의 할리우드 수출이었다.
1996년 성룡 주연 홍콩제작영화 ‘홍번구’가 미국시장에서 주간 흥행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키자 할리우드는 새로운 유행을 감지, 홍콩에서 ‘특별한’ 상업영화들을 만들어내던 인력을 한꺼번에 초청하기에 이른다. 성룡 뒤를 이어 주윤발, 이연걸, 양자경 등 대스타들이 속속 할리우드 입성에 성공했고, 이들의 영화를 만들어내던 오우삼, 서극, 임영동, 우인태, 황지강, 진가신, 당계례 등 스타급 감독들 또한 모두 할리우드에서 연출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다보니 홍콩영화계는 당연히 공동현상을 맞게 됐다. 시장을 이끌어갈 주역들이 모두 빠져버려 시장동력이 상실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성룡 정도가 할리우드 영화와 자국영화에 번갈아가며 출연하는 ‘성의’를 보였을 뿐이다.

결국 시장을 이끌어갈 특A급 스타도, 완성도 높은 상업영화를 만들어낼 감독들도 모두 빠져나가 버린 현실에서, 거기다 불법복제 VCD에 의해 시장이 완전히 초토화돼 대범한 시도와 도전을 꾀할 만한 여건이 모두 휘발돼버린 상황에서, 홍콩영화산업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전 히트 공식들을 답습하며 아류작들을 양산하고 수많은 속편들을 제작하는 것. 사실상 최악의 수였지만, 홍콩영화산업은 이미 지쳐있었다. 전향적 아이디어가 실행될 만한 여건이 못 됐다.

일각에선 이 같은 홍콩영화인들의 전폭적 할리우드 수출 상황에 대해 1997년 홍콩 반환이 그 배경이 됐다고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반환 이후 어떤 상황이 밀어 닥칠지 몰라 너도나도 홍콩을 버리고 할리우드 커리어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아주 틀린 얘긴 아니지만, 근본적인 배경설정에 오류가 있다.

홍콩영화인들의 할리우드 수출은 ‘홍콩이 원해서’ 벌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할리우드가 원했다. 1990년 중반 무렵, 홍콩영화는 이미 미국 내 비디오시장에서 현상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홍번구’ 미국개봉 직전인 1996년 초엽, 할리우드에서 단 한편의 주연작도 찍은 적 없는 성룡이 MTV 무비어워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예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오우삼의 ‘첩혈쌍웅’은 미국 갱스터들에 쌍권총을 유행시켰을 정도로 현상적인 인기를 누렸고, 미국 유수의 비디오대여점들은 ‘백발마녀전’ 등 홍콩무협영화들을 전면에 비치하는 전략으로 짭짤한 수익을 얻어냈다.

한 마디로 홍콩영화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던 시기, 그리고 홍콩 반환을 코앞에 두고 있던 시기, 우연찮게도 미국에선 홍콩영화 붐이 일반대중 차원에서 폭발적으로 일고 있었다는 얘기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누구건 간에 지구촌을 수십 년째 휘어잡고 있는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고 싶지 않은 영화인은 없다. 결국 인력 수출로 인한 홍콩영화산업의 공동현상 역시,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실패학의 기묘한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팔 곳이 사라져버린 21세기

물론 홍콩영화산업도 마냥 무기력하고 무책임했던 것만은 아니다. 21세기 들어 홍콩영화산업은 재도약의 발판을 여러 번 마련해냈다. 일단 할리우드 커리어가 미미한 수준에 그쳤던 스타들과 감독들이 모조리 홍콩으로 되돌아왔다. 인력 공동현상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거기다 불법복제 시장 근절에 대한 정부의 노력이 상당부분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2004년 관행부서는 1억3600만 홍콩달러 어치 불법복제 VCD와 DVD 622만 장을 압수하고, 무려 1289명에 이르는 불법복제 업자들을 구속하는 초강경 대응에 나섰다. 또한 2000년부터 반(反)인터넷해적행위팀(AIPT)을 구성, 불법복제 인터넷 파일 공유행위 등을 강력히 단속했다. 그 결과 현재 홍콩영화산업에서 불법복제 시장 규모는 크게 축소됐으며, 1990년대 이전 수준의 소규모 불법복제 시장만 남게 됐다.

이런 식으로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자 영화 퀄리티도 조금씩 나아지고, 세계적으로 홍콩영화가 인정받는 계기도 다시 마련됐다. 주성치는 ‘소림축구’ 등을 통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상업영화를 내놓았고, ‘무간도’는 할리우드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돼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는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

그러나 그래도 홍콩영화의 전성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홍콩영화는 본래 내수시장만으로는 크게 뻗어나갈 수가 없는 구조다. 홍콩 인구는 기껏해야 700만 명 선이다. 결국 대만을 필두로 태국, 필리핀,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홍콩영화를 소비해줘야 돌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홍콩영화산업이었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1980년대 홍콩영화 르네상스도 성룡 영화를 중심으로 홍콩영화가 아시아 각국에서 활발하게 소비되는 상황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아시아 영화는 2000년을 전후로 할리우드의 압제에서 독립, 각자 탄탄한 자국영화 시장을 구축해나갔다. 홍콩영화가 1980년대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요인, 즉 장르영화 시장을 개척해내면서부터다. 한국은 ‘쉬리’ ‘유령’ 등이 등장했던 1999년을 기점으로 장르영화 강국으로 거듭났고, 태국은 토니 자라는 걸출한 스타의 등장을 통해 자국 무술영화 시장을 개척, 더 이상 홍콩 쿵푸영화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

필리핀 역시 ‘펭 슈이’ ‘수콥’ 등으로 역대 흥행기록을 새로 쓴 치토 S. 로뇨 감독의 맹활약으로 자국 장르영화 시장이 탄탄해졌고, 자국영화 시장이 더없이 탄탄한 인도도 SF영화 ‘코이 밀 가야’ 등을 내놓아 끊임없는 도전과 변신을 시도했다. 그나마 홍콩영화들을 계속 소비해주던 일본마저 ‘데스 노트’ ‘일본침몰’ ‘우미자루’ 등 블록버스터급 장르영화들을 개발해 시장을 확충시키자, 더 이상 홍콩영화를 소비해줄 아시아 국가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믿었던 잠재관객 13억 짜리 중국시장은 자국영화 육성조치 일환으로 소수 외국영화들에만 중국 내 상영허가를 내줬고, 그 과정에서 홍콩영화 역시 외국영화로 분류돼 제한적인 시장 내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동급으로 경쟁해야만 했다. 대만은 이미 1990년대 악몽의 시기에 홍콩영화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할리우드 영화에 집중하게 됐다.

이런 식이니 뉴웨이브 영화작가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홍콩영화의 전성기는 도무지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산업 전체의 역량이 저하되는 현상까지 낳게 됐다. 한 마디로, 안 되는 산업에 인재가 모일 리 없다는 것이다. 전문 각본가에서부터 시작해 영화제작에 가담하는 모든 스태프 수준이 떨어지게 됐다.

한편 침체된 영화산업에서는 스타산업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 새로운 스타는 나오지 않고 전성기 시절 인지도를 얻은 스타들이 장수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아직까지도 홍콩영화계를 주름 잡고 있는 스타들은 주윤발, 양조위, 주성치, 유덕화 등 1980~90년대 초반 스타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40대 후반에서 50대로 접어 들어있다. 여전히 그 나물에 그 밥, 신선감이 유지되질 않으니 자국 관객들조차 지루함을 느끼게 됐다. 그렇게 모두들 패망의 길로 한걸음씩 접어들게 된 것이다.



점차 홍콩의 복사판이 돼가고 있는 한국영화산업 현실

굳이 홍콩영화산업의 지난한 몰락 과정을 차례대로 분석한 이유가 있다. 근래 들어 한국영화산업에서도 홍콩영화산업 몰락의 요인들이 하나둘 발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발생순서 또한 유사하다.

먼저 홍콩의 불법복제 VCD 시장과 맞먹는 인터넷 불법 웹하드 시장 확대 상황이 있다. 인터넷 불법 웹하드는 이미 DVD 등 2차 시장은 완전히 초토화시킨 상태고, 점차 1차 시장까지 침범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록 홍콩처럼 대규모 범죄조직이 뒤에 자리 잡고 있진 않아 미개봉작까지 고화질 파일로 유통되고 있진 않아도, 기술은 점점 발전해 극장에서 찍은 캠 버전일지라도 ‘대충’ 볼만한 화질로 나오고 있다.

거기다 인력 수출 상황까지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다. 근래 한국영화를 이끌어가던 주역들 중 김지운 감독이 가장 먼저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다. 최신작 ‘언노운’이 막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리암 니슨 주연으로 ‘라스트 스탠드’라는 영화를 제작중이다. ‘올드보이’의 영웅 박찬욱 감독도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우리에게 ‘석호필’로 불리는 웬트워스 밀러 각본으로, 올해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이 유력한 콜린 퍼스,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니콜 키드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스타덤에 오른 미아 워시코우스카 등이 출연할 예정이다.

배우들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수와 배우를 병행하는 정지훈은 조연급 ‘스피드 레이서’에 이어 주연급 ‘닌자 어쌔신’을 성공시킨 상황이다. 장동건 역시 비록 실패를 거두긴 했지만 ‘워리어스 웨이’로 할리우드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이병헌 역시 ‘지아이 조’의 성공으로 나름 인정을 받아 당분간 할리우드 커리어에 큰 관심을 쏟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한풀 꺾인 시장분위기 탓에 스타들의 노화현상도 홍콩과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고, 장기화 된 경제 불황 등 무거운 현실 탓인지 점차 관객취향이 가벼운 코미디 쪽으로 이동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물론 홍콩 인구의 7배에 달하는 5000만의 탄탄한 내수시장이 받쳐주고 있어 근본적으로 홍콩과 같은 딜레마는 나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홍콩영화산업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만큼은 절대 기우가 아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미 발견된 시장위험성을 제거해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인터넷 불법 웹하드 시장 근절부터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할리우드 인력 수출에 따른 공동현상도 어떤 식으로건 대비책을 마련해둘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시장 분위기에 끌려가지 말고 보다 전향적인 아이디어로 대중취향을 이끌어낼 도전정신 역시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작업이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언급했듯, 홍콩도 결국은 자국시장 문제점들을 해결해내긴 했다. 다만 그 속도가 느려 제대로 된 효과를 못 봤을 뿐이다.

한국영화산업의 각성과 빠른 결단력, 섬세한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칼럼니스트 이문원 fletch@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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