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꽃비·오인혜가 보여준 레드카펫의 영향력
[엔터미디어=조원희의 로스트 하이웨이] 지난 10월 6일 열린 제 16회 부산 국제 영화제의 레드카펫 행사, 영화계 최고의 스타들이 모이는 연간 최고의 영화 이벤트다. 거의 모든 세계의 영화제들이 그렇듯, 이런 레드 카펫 행사에는 격식 있는 옷차림이 요구된다. 그래서 남성 배우들은 대부분 포멀한 정장을 선택하고, 여성 배우들은 보통 ‘이브닝 드레스’ 계열을 선택한다. 우리 영화제의 드레스 코드는 그렇게 엄격한 편이 아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칸 영화제 같은 경우는 드레스 코드를 어기면 공식 상영하는 극장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다. 우리의 영화제에서 편안한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이 용인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조금 ‘지나친 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배우와 감독 등 영화 관계자들이 레드 카펫 위를 행진하고 포토월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모여든 관중에 인사하는 이 행사에서 ‘베스트 드레서’를 뽑는 것은 전통적인 행위다. 물론 공식적으로 심사를 하는 기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16회 영화제의 베스트 드레서는 당연히 김꽃비였다. 수수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을 행진한 김꽃비가 포토월 앞에서 강정 해군기지 유치 반대와 한진 중공업 사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하는 배너를 펼쳐들었다. 그 전에, 김꽃비는 한진 중공업의 작업복, 한진 노동자들이 스스로 ‘스머프 옷’이라고 부르는 파란 작업복을 걸쳐 입으며 메시지를 전했다. 사실 강정과 한진 중공업 사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중요한 해법 중 하나인 문제다. 하지만 주류 언론에서는 좀처럼 다뤄주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여배우는 그렇게 화제의 인물이 됐다. 김꽃비는 이후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저는 한 일이 없는데 이렇게 칭찬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조광수 대표님이 아이디어를 내 제안을 해오셨고, 평소 노동자의 권익이나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러나 한진에 힘을 싣지 못했던) 저는 영광스럽게 기꺼이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레드카펫은 무엇인가를 ‘알리는’ 데 적합한 장소다. 김꽃비는 한진 85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알렸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이도 있다. 오랫동안 검색어 1위에 올라있던 오인혜다.
박철수 감독의 새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신인 배우 오인혜는 파격적인 레드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 위를 걸었다. 그리고 포토월에서 수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찍은 오인혜의 사진은 실시간으로 인터넷 미디어들을 휩쓸었다. 어떤 이들은 ‘좋은 구경’을 하게 해 준 오인혜에게 감사하는 댓글을 올리기도 했고 선정적인 의상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인혜가 ‘자신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조금은 가려진 몸매’를 널리 알리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김꽃비가 의로운 일을 했고 오인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오인혜가 출연한 영화는 큰 예산을 들인 영화도 아니고 마케팅 포인트가 분명한 작품도 아니다. 영화를 찍고 개봉하는 이유가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오인혜는 좋은 기회를 잡았을 뿐이다. 만약 내가 오인혜가 출연한 영화의 감독이었다면 오인혜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오인혜의 드레스 덕분에 좋은 기분을 느낀 시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덧붙이자면 김꽃비의 작업복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여배우들의 옷차림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사실 레드 카펫 위에서는 별 일이 다 일어나고 별 희한한 패션이 다 등장한다. 2005년 칸 영화제에서는 프랑스의 국민배우 소피 마르소가 ‘완전한 실수’로 가슴을 노출하는 사고가 있기도 했고 2001년 오스카 레드 카펫에서는 비욕이 충격적인 ‘오리 패션’으로 등장해 두고 두고 워스트 드레서의 본좌로 손꼽히기도 했다. 영화제의 레드 카펫은 오인혜처럼 기존 미디어의 수혜를 입지 못했던 배우들이 단 한순간에 이름과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좋지 않은 표현으로 ‘무명의’ 배우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김꽃비처럼 소금꽃 피는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오인혜처럼 원래 가슴 아래에 조임 라인이 오게 돼 있는 엠파이어 스타일 드레스의 라인을 허리로 내려서 입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그 순간, 그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고 또 세상이 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두고 있는 이들은 많다. 영화는 소비자들이 ‘요금을 직접 지불’ 하는 시스템의 예술 중 하나다. 그리고 감상을 끝내기 전에는 그 품질을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구매해야만 하는 경험재다. 뿐만 아니라 주연급 연기자들의 개런티는 시민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거액인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많은 이유들 때문에 ‘영화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알릴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까.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에게 맡겨질 문제다. 어느 한 쪽이 옳은 것이고 그렇게 당연히 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해선 안 된다.
김꽃비는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연이어 전했다.
“레드 카펫에서 작업복을 입었던 어떤 여배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아직도 크레인 위에서 투쟁 중이신 김진숙님을 잊지 말고 지지해 주십시오”
칼럼니스트 조원희 owen.joe@entermedia.co.kr
[사진=김꽃비 미니홈피,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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