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냥 한번 해본 소리입니다
[엔터미디어=나지언의 어떻게 그런 말을] “대머린 기분 나쁜데요.”
10월 8일 방영된 <무한도전>의 ‘무한상사’ 편에서 ‘빡빡이’ 대신 ‘대머리’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배현진 아나운서의 조언을 듣고 길이 한 말.
만약 무인도에 한 가지 물건을 가져가야 한다면 맥가이버 칼, 일용할 식량, 라이터, 지성인의 필수 소장품인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아이패드에 지난 10월 8일 방영된 <무한도전> ‘무한상사’ 편을 담아갈 거다. 주말에도 만나자는 눈치 없는 상사 때문에 짜증났다면 지금 당장 저 에피소드를 꼭 보라. 인생의 시름과 우환 따윈 금새 잊혀질 테니까 말이다.
‘무한상사’는 오전 11시에 짜장면 시켜 먹는 박차장(박명수), 보고서 내라는데 컴퓨터를 못해 색연필로 그림 그리고 있는 정과장(정준하) 등 직장에서 일어나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이고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되는 일을 그리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무한상사 편’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방송의 품위를 저해하고 청소년을 비롯한 시청자의 언어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아주 긴 이유로 경고 징계를 받은 것에 대한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답가’였다.
박명수의 지적대로 인터넷 검색 말고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그들은 오후에는 또 근무 대신 MBC <뉴스데스크> 아나운서 배현진으로부터 바른 말 쓰기 강의를 듣는다. 아나운서 배현진은 ‘멍충이’ 대신 ‘약간은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를, ‘빡빡이’ 대신 ‘대머리’를 쓰라고 조언하는데 길은 이렇게 말한다. “대머린 기분 나쁜데요.” 정준하도 ‘모자르다’는 표현에 발끈한다. 나 같아도 멍충이 소리를 듣는 게 카타르시스도 더 생기고 좋을 것 같다. ‘약간은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라니 지금 놀리는 건가? 애정 담긴 ‘빡빡이’가 팩트만 전달하는 무심한 ‘대머리’보다 훨씬 귀엽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고.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돌려 말한 적 없을 것 같은 박명수 역시 ‘에라이’라는 표현은 하루에 400번이나 쓴다면서 울화통을 낸다. 멍충이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말이라는 배현진 아나운서의 얘기에 “저희는 배려를 하지 않아요. 배려를 안 한다니까요!”라고 말한다. 얼굴에 짜증과 피로가 아름답게 붙어 있어 우리에게 ‘나만 피로한 게 아니라는 위안’을 주는 박명수는 결국 소리친다. “한번 웃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말씀 그렇게 편하게 하십니까. 데스크에만 계시지 말고 현장에서 좀 보세요!” 잠깐, 지금 이거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 눈치 없는 사람들이야 뭔 소린지 못 알아듣고 양반다리 한 채로 “<무한도전> 착해졌네”라며 잘 시청하고 곧바로 <뉴스데스크> 관람하셨겠지만, 평소 저해할 품위 별로 없고 TV로부터 부정적 언어생활 거의 받은 적 없는 시청자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안다. 다시 돌려보니 이런 주옥 같은 대사들도 즉흥적으로 나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아무것도 안 하는 ‘무한상사’에 대해 “이게 피시방에 있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박명수), 색연필로 보고서 작성하는 정준하를 보고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노홍철), 상사와 부하 직원이 역할을 바꿔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자리를 마련했을 때 유부장(유재석)을 엄청 괴롭힌 다음에 “뭔지도 모르고 그냥 한 겁니다. 그냥 큰소리 한번 치고 싶었습니다”(정준하).
혹시 ‘무한상사’에서 상사’는 회사가 아니라 보스라는 의미는 아닐까? 그렇다. 풍자와 조롱이 뒤섞인 블랙 유머야말로 21세기의 예능 프로그램이 나아가야 할 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채찍질은 옳았다. 시청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숨은 의미를 유추하게 하고 현 시대의 부조리에 대해 고뇌하게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확인하는데, 직설적인 비속어는 안 되고 비꼬는 건 되는 거지? 빡빡이는 안되고 대머리는 되는 것처럼?
칼럼니스트 나지언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피처 디렉터> nahjiun@paran.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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