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미네이터’를 한국에서 리메이크하면 어떨까?

[엔터미디어=이문원의 쇼비지니스]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 도쿄 나이트’가 12월 1일 국내 개봉될 예정이다. 한국대중 입장에선 뭔가 ‘빤한’ 영화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지난 수십 년 간 이른바 ‘가짜 속편’들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입장이다. ‘레옹 2’에서부터 ‘글래디에이터 2’까지 안 나온 속편이 없다. 대부분 극장에 하루라도 영화를 걸어 비디오·DVD 등 2차 시장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 벌인 일들이다. 유명히트작 속편이라고 해놓으면 극장진입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도쿄 나이트’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일단 영화의 일본 원제도 ‘파라노말 액티비티 제2장 도쿄 나이트’다. 저작권 개념의 천국인 일본조차 이런 식의 ‘장난’을 치나 싶어 정보를 찾아보면,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도쿄 나이트’는 애초 원작이 된 미국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 원작자 오렌 펠리와 배급사 파라마운트 측으로부터 일본제작사 프리시디오 코퍼레이션 측이 판권을 정식 계약해 제목과 콘셉트를 들여온 영화다.

이 ‘파라노말 액티비티: 도쿄 나이트’ 건에서 한국영화산업이 힌트를 얻어 볼만한 부분이 있다. 지금 당장 할리우드에서 인기 있는 영화의 제목과 콘셉트를 사와 ‘진짜 번외편’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일본이 ‘파라노말 액티비티: 도쿄 나이트’ 이전부터도 꾸준히 해외원작의 판권을 보유하며 이를 리메이크 도구로 활용해온 점에 착안할 필요가 있다.

◆ 어찌됐건 ‘소재 확보’에 골몰하는 일본영화산업

일본은 심지어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판권을 사간 바 있다. 영화 ‘두사부일체’는 TV드라마 ‘마이 보스, 마이 히어로’로 재탄생시킨 바 있고, 영화 ‘조용한 가족’이나 ‘8월의 크리스마스’ 등도 모두 리메이크한 경험이 있다.

한국에서 사간 것만도 이 정도인데, 그 외 지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장 지난해 송승헌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고스트: 보이지 않는 사랑’도 할리우드의 1990년 대히트작 ‘사랑과 영혼’ 판권을 사와 리메이크한 경우다. ‘소림축구’의 주성치를 기획으로 앉혀놓고 같은 스타일의 복제판인 ‘소림소녀’를 제작해 15억엔 이상을 벌어들인 적도 있다. 그야말로 전 세계로부터 판권을 사오거나 스타일 카피의 ‘권리’를 사와 재생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아직 출판시장이 탄탄히 버텨주고 있어 수많은 만화와 소설의 소재 베이스가 있고, TV드라마의 극장판이 유난히 장사가 잘 되는 유리한 입장인데도, 이처럼 소재 확보에 골몰하고 있다. 근래 들어서야 조금씩 소설 원작 영화나 웹툰 원작 영화의 반응이 오고 있는 한국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있는 놈이 더 한다’는 말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아무리 소재가 쌓여있어도, 그래도 일단은 더 확보해놓고 보는 게 일본영화산업의 생리다.

물론 한국영화산업도 이 같은 해외영화 리메이크 판권확보와 제작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일본드라마나 일본만화 등 일본원작의 판권확보에만 신경써온 게 사실이다. ‘올드 보이’ ‘사랑따윈 필요없어’ ‘미녀는 괴로워’ ‘검은 집’ ‘어깨너머의 연인’ 등이 그들이다. 반면 일본 외 지역에서는 근래 들어 아무리 돌아봐도 홍콩의 ‘영웅본색’을 리메이크해놓고 그 사실을 애써 홍보하지 않은 ‘무적자’ 정도가 유일하다.

리메이크를 위한 판권계약은, 해당영화가 오래된 것일수록 값이 싸지는 게 상례다. 미국에서 2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던 ‘사랑과 영혼’만 해도 20년이 지나자 헐값에 판권을 사들여 딱히 제작비가 많이 들지 않은 중급영화로 일본에서 리메이크됐다. 한국도 해볼 만한 환경은 맞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20~30대 중심으로 전체 극장흥행 판이 계속 물갈이되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문화적 환경 탓에 옛 영화들은 그야말로 ‘깡그리’ 잊히기 십상이다.

단적으로 말해, ‘터미네이터’ 1편을 한국에서 리메이크한다 해도 현재 영화 주 소비층인 20대 입장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콘텐츠’일 확률도 높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한 번 판권을 들여와 리메이크해봄직한 ‘일본 이외 국가’의 영화들을 몇 편 꼽아보기로 하자.



<아비정전> (홍콩, 1990)
1990년대 청년세대에 있어선 바이블과도 같은 영화지만, 지금 그 세대는 30대 중반~40대 중반에 이르렀다. 영화의 주 소비층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지금 극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세대들에는 ‘제목만 아는 영화’일 확률이 높고, 제목조차 낯설 수도 있다.

‘아비정전’ 리메이크의 장점은 많다. 일단 왕가위 영화들 중에서 가장 플롯이 탄탄해 단순 얘깃거리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대의 청춘스타들들 총집결시킬 수 있는 콘셉트다. ‘아비정전’이 개봉됐을 당시에도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양조위, 장만옥, 유가령의 총집합은 큰 화제가 됐었다. 지금 한국 상황으로 돌려놓고 보면, 유아인, 송중기, 소지섭, 강동원, 임수정, 이민정 등 떠오르는 이름들이 수도 없이 나온다. 한국의 1970~80년대 배경으로 옮겨놓았을 때 딱히 충돌하는 구석이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알카트라스 탈출> (미국, 1979)
한국대중은 탈옥영화들을 수업이 즐겨왔다. 그런데 그 모두가 할리우드 영화들이었다. 1963년 ‘대탈주’부터 시작해 1994년 ‘쇼생크 탈출’까지 모조리 미국탈옥영화에는 환호해왔으면서, 정작 한국영화로는 탈옥묘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광복절 특사’ 정도만 성공했다.

아예 미국에서 탈옥영화 ‘정석’처럼 여겨지는 ‘알카트라스 탈출’을 들여와, 현 교도체계와 무관(?)한 1970년대 즈음을 배경으로 얘깃거리를 만들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시도일 듯싶다. 특히 당시 한국의 시대상황과 엮어 만들어내면 오히려 리메이크의 가치를 드높인 사례로도 꼽힐 수 있을 법하다. ‘알카트라스 탈출’의 장점은, 탈옥의 테크닉과 과정 외에 별다른 배경이나 캐릭터 묘사가 없다는 점이다. 더 만들어 넣기 나름이란 얘기다. 벌써 32년 전 영화니 판권비용은 참 낮을 것 같다는 예상이다.

<새장 안의 새들> (프랑스, 1978)
1973년 프랑스에서 연극으로 처음 등장했고, 1978년엔 프랑스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1983년에는 바다 건너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도 등장했다. 그리고 1996년엔 할리우드에서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버드케이지’로 다시 한 번 흥행에 성공한 바 있다. 그 사이 프랑스에선 2편의 속편이 더 제작됐다. 한 마디로 프랑스-미국에선 ‘해먹을 만큼 다 해먹은’ 콘텐트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소재가 바로 지금, 21세기 한국 실정에선 참 잘 맞는다. 보수 정치인 집안의 딸이 게이 아버지를 둔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촌극을 다뤘다. 근래 들어 정치 코드가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라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할 듯싶고, 동성애 문화에 대한 편견이 상당부분 사그라들어 이제는 코미디 소재로 활용해도 무방한 시점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미스터 몬스터> (이태리, 1994)
흔히 로베르토 베니니라고 하면 ‘인생은 아름다워’만 떠올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잊혀진 분위기다. 그런데 베니니의 진정한 하이타임은 그가 신분위장-신분오해 코미디를 만들어내던 1990~1995년 사이, 그 역할을 담당한 영화 ‘자니 스테치노’와 ‘미스터 몬스터’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미스터 몬스터’의 국내 리메이크 기획은 1990년대 중후반 잠시 거론된 바가 있다. 하여간 그때 엎어졌으니 제대로 못 만들어진 것일 테다. 아직 판권이 살아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미스터 몬스터’ 류의 신분위장-신분오해 코미디는 베니니 같은 천재적인 피지컬 코미디 대가의 존재 없이도 충분히 재밌어질 수 있다. 상황 자체가 우습기 때문이다.

그 대표작 둘을 놓고 봤을 때 ‘자니 스테치노’보다는 ‘미스터 몬스터’ 쪽이 더 나으리란 예상이다. 마피아 거물로 오해받는 코미디보다는 변태연쇄살인범 오해를 받는 코미디 쪽이 국내 사정에 더 잘 맞아떨어질 듯하다. 전자는, 다른 식으로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밖에도 많다. 그 리메이크가 바로 올해 미국서 등장한 바 있지만, 여전히 국내 관심을 못 모은 ‘미스터 아더’(미국, 1981)가 있다. 부잣집 상속녀와의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서민층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귀여운 술주정뱅이 거부의 얘기는 각종 신분상승 TV드라마에 골몰해있는 여성층 시선을 잡아끌 수 있다.

‘폴리스 아카데미’(미국, 1984)도 현재 한국 실정에서 괜찮은 소재다. 경찰관 응모 자격이 대폭 완화되면서 동네 어중이떠중이, 백수에 변태들까지 모조리 ‘폴리스 아카데미’에 들어와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한국의 88만원세대 현실과도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다.



장 폴 벨몽도의 ‘유쾌한 은행털이’(1985)나 ‘나이스 줄리’(1984) 등 1980년대 프랑스 코미디의 정수들도 리메이크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다. 홍콩에서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부활시킨 ‘만주 웨스턴’ 전통을 이을 수 있는 ‘부귀열차’(1986), 프랭크 카프라의 ‘포켓 속의 기적’에 착안한 성룡의 ‘미라클’(1989) 등 많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괜찮은 소재들이 많다. ‘네 번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풀 몬티’ 등 1990년대 영국 로맨틱 코미디들도 번안 시 유리한 점이 많을 듯싶다.

어찌됐건 한국영화 르네상스로부터 무려 15년 이상이 경과한 지금도 여전히 한국영화산업의 가장 큰 문제로 여겨지는 ‘소재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이처럼 방대하고 광범위한 해외영화 리메이크에도 관심을 가져봐야 할 때는 맞다. 괜히 ‘무적자’처럼 노스탤지어에 기대는 심정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인 ‘소재 확대’ 차원에서 그렇다.

그리고 소재들을 해외 콘텐츠에서 가져온다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다. 한국 아이돌그룹들이 유럽 작곡가 곡을 가져온다 해서 그 음악이 유럽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점쯤은 이제 모두가 알아차렸을 법하다. 오히려 ‘한국에서 한 번 손을 거친’ 유럽 작곡가들의 음악이 도로 유럽으로 돌아가 판을 키우고 있는 와중이다. ‘한국에서 한 번 손을 거친’ 해외영화 리메이크들이 어쩌면 도로 원산지로 돌아가 관심과 화제를 불러 모으며 마지막 한류상품인 한국영화의 발판을 마련해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전략이다.


칼럼니스트 이문원 fletch@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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