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배우가 젊은 외모의 늙은이를 연기할 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얼마 전에 국립발레단에서 공연한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보고 왔다. 같이 갔던 동행은 처음에 캐릭터들을 구별하는 데 애를 조금 먹었다고 했다. 특히 처음에 유모가 등장했을 때는 저게 유모인지, 줄리엣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나. 괴상하게 들리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분명 의상이 튀긴 하지만 이 발레에서 유모는 일반적으로 이 캐릭터를 정의하는 성격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이요의 유모는 뚱뚱하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듣다가, 마이요의 발레에는 늙음이 제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베로나의 공작이나 줄리엣의 아빠는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로렌스 신부는 훤칠한 젊은이로, 심지어 몇몇 관객들은 로미오보다 줄리엣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줄리엣 엄마는 오히려 줄리엣보다 더 섹시하고 육감적이다. 이 발레가 벌어지는 무대 위의 베로나에는 오로지 젊은 육체를 가진 사람들만 있다. 마이요가 의도한 미니멀리즘을 생각해보면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발레에서 늙음은 불필요한 디테일을 추가할 뿐이다.

늙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이야기가 나왔으니, 당연히 <인 타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이 25살 이후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가상 세계가 배경이다.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연기한 여자주인공은 25세가 되자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날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남은 평생 동안 봐야 할 얼굴이니까.

정말 그렇지는 않다. 불사와 영원한 젊음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인 타임>도 노화와 성장을 지나치게 가볍게 다루는 구석이 있다. 피부나 근육이 젊음을 잃지 않더라도 사람의 얼굴은 변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귀와 코는 죽을 때까지 계속 자란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이라면 200살 톰 크루즈 뱀파이어는 20살 톰 크루즈 뱀파이어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 사람들의 신체 기준과 외모의 기준도 바뀐다. 다시 말해 <인 타임>의 시대에도 여전히 성형외과와 기타 미용관련 업체는 바쁠 것이며, 그 세계 사람들의 외모도 꾸준히 바뀔 가능성이 크다. 이 가능성을 다루는 SF가 거의 없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인 타임>을 보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건 영화의 그림이 의외로 심심하다는 것이었다. 모델 타입의 잘생긴 젊은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니 예쁘긴 하다. (저스틴 팀벌레이크의 엄마가 올리비아 와일드인 세계이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이 없으니, 영화는 시각적인 다채로움을 잃어버린다. 사탕과 과자만 잔뜩 있는 어린이용 뷔페에 온 기분이랄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심각하게 늙은 육체의 비주얼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보통 성형수술이나 보톡스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예찬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일단 나이를 먹은 뒤에도 자연스러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세계의 사람들의 외모는 성형수술과 보톡스로 무장한 사람들의 외모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성형수술과 보톡스 시술이 비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늙음을 지워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만약 배우가 30대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표정과 외모의 자연스러움까지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이 성형수술을 하건, 보톡스를 맞건 무슨 상관일까. 사람들은 주름살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연기를 하는 것은 주름살이 아니라 그 주름을 가진 배우이다. 시시한 배우는 아무리 주름이 많아도 시시하다.

만약 우리가 별도의 시술없이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세계를 산다면 그걸 누리는 건 당연한 것이고 그걸 거부하는 것이야 말로 민폐일 것이다. 노화는, 길게는 수십 년을 끄는 죽음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고생을 뒤집어 쓰는 건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다. 단순히 주름살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 타임>의 세계가 심심해보이는 것도 정말 늙은 외모의 사람들이 덜 보이기 때문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정말로 <인 타임>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나이 든 사람들은 여전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튀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외모는 내면의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피부가 탱탱하더라도 나이 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그 영향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에게 젊은 외모의 늙은이를 연기시킬 때에는 당연한 핸디캡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데, 감독인 앤드루 니콜은 여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훌륭한 배우라면 별다른 분장 없이 이를 표현할 수 있다. 70대에 커밍아웃한 게이 아빠와 30대 아들의 관계를 다룬 <비기너스>가 곧 개봉하는데, 한 번 보시라. 70대 암환자를 연기하는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얼마나 젊고 싱싱해보이는지, 그의 아들을 연기하는 유안 맥그리거가 얼마나 나이 들고 지쳐보이는지 알아차리고 깜짝 놀랄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도 우린 자신의 실제 나이와 어긋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자기 나이에 맞는 성숙함과 깊이를 가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젊음과 동안에 집착하는 우리나라의 문화는 조금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이듦이란 온갖 방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온갖 얼굴을 가진 다양한 과정의 집합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병적으로 거부하는 세계를 살고 있다면, 그건 젊은 사람들이 그 사회의 늙은이들, 특히 자신네들을 원로라고 부르는 자들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이나 지혜도 읽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노인들을 기르지 못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인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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