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 깊은 나무’, 세종도 악역될 수 있는 독특한 드라마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야구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났다. 짝 없는 야구팬으로서는 무척이나 부러운 노릇이겠으나, 예컨대 남자가 롯데 자이언츠 팬이고 여자가 SK 와이번스의 팬이라면? 적어도 시즌 중 1/7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불화를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도처에 널렸다. 아이돌 그룹 2PM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만난 친구라도 닉쿤이 잘났느니 택연이 더 잘났느니 하다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고, 평양냉면 동호회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식초를 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언쟁이 벌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 속 갈등이란 생각보다 사소하고도 디테일한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이 말에서 방점은 ‘현실’에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그 현실의 갈등이란 대개 극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고로, 특히 좀 더 많은 대중과 상대해야 하는 극인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갈등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과 악, 권력자와 피억압자, 부자와 가난한 자, 구세대의 가치와 신세대의 가치, 기타 등등. 당연한 이야기다. 시트콤이 아닌 다음에야 ‘평양냉면 먹는 법을 가지고 대립하는 두 어르신의 우정과 갈등’ 따위의 이야기로 누가 드라마를 쓰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SBS 수목 미니시리즈 <뿌리 깊은 나무>는 좀 이상한 드라마다. 이 작품에서 주된 갈등을 이끄는 캐릭터들은 크게 강채윤, 세종, 그리고 정기준과 밀본 세력의 셋으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이 셋이 지향하는 바가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강채윤은 피맺힌 원한으로 호시탐탐 세종의 목숨을 노리고, 정기준과 밀본 세력은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정치철학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혁명에 가까운 뜻을 품고 세종에 맞선다.

하지만 그 갈등을 이끄는 개개 캐릭터의 동력은 무엇인가? 강채윤은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기억 때문에 ‘신분이 천한 사람의 목숨도 함부로 뺏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세종 또한 ‘더 이상 자신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며 다짐하는 임금이다. 정기준과 밀본이 구현하고자 하는 정도전의 이상, 즉 재상 중심주의의 지향점도 결국은 ‘백성을 위한 정치 실현’이다. 세종의 표현을 빌자면 모두의 ‘대의’가 다르지 않다.

결국 <뿌리 깊은 나무>의 극적 갈등이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권력자와 피억압자와 같은 선명한 대립이 아니다. 샤이니와 2PM,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싸움이 아니라, 식초를 치느냐 마느냐처럼 구체적인 노선 차이 또는 디테일한 오해에서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구도에서 비롯된 극적 갈등. <뿌리 깊은 나무>가 지닌 서사의 탁월함은 기본적으로 여기서 나온다.

우선 명백한 대립자(이를테면 이신적과 같은 기회주의자들)는 들러리로 둔 채, 주된 인물들에게는 모두 같은 뿌리를 갖게 했다. 그들의 뿌리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극 중에서 서스펜스로 활용되며, 그 과정에서 3자 구도는 모호한 채로 객관화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몰입할 수 있으며, 또한 몰입이 쉽지 않게끔 객관화된 구도.




생각해 보자.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과연 누구일까? 강채윤? 종래의 사극 관습에서 볼 때 그는 전형적인 영웅의 성장과정을 밟아온 인물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이미 조선조 최고의 성군으로 예정되어 있는 세종에게 칼끝을 겨눌 인물이다. 정기준? 그 또한 마찬가지. 세종은 어떤가. 강채윤과 정기준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극중에서 타도해야 할 거대한 안타고니스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가 히어로이면서 또한 안티 히어로이기도 한 셈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특히 장르 드라마에서 트렌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의 발전이었다. 각기 다른 지향점을 지닌 인물들이 갈등하고,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메인 캐릭터의 삶과 지향에 공감하도록 하는 고전적 작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른바 선과 악의 역할 바꾸기가 시작되었다. <하얀 거탑>, <마왕>, <선덕여왕>, 그리고 최근의 <욕망의 불꽃>과 <로열 패밀리>, <미스 리플리>에 이르기까지, 예전에는 길을 가다가 이유 없이 돌팔매질도 당했을 법한 배역들에 시청자들이 더욱 공감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주인공 자리까지 꿰차기도 했다. ‘악역이 대세’라는 말과 함께 한층 풍성해졌던 드라마 속 인물들. 그 다음 단계의 진화형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다른 방향을 향해 자라는 잎사귀처럼 보이나 결국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뿌리 깊은 나무> 캐릭터들이 바로 그 대답이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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