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 동시대 여성들에게 전하는 가장 급진적인 메시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결백>은 시골에서 일어난 농약 막걸리 사건을 모티브로, 살인자로 몰린 엄마를 변호하는 딸을 그린 영화이다.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영민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던 영은수 검사를 연기했던 신혜선이 사건 해결을 해나가는 당찬 변호사로 등장하고, 오랫동안 TV 드라마에서 똑똑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던 배종옥이 그동안의 이미지와 상반된 치매 걸린 노인으로 열연하는 등 캐스팅과 연기만으로도 화제가 될 만하다.

영화 <결백>은 꽤 흥미롭다. 일단 시골의 초상집에서 막걸리를 나눠 먹은 문상객들이 쓰러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엉터리 초동수사로 현장에 있던 망자의 처 화자(배종옥)가 체포된다는 사건의 출발이 리드미컬하다. 일찌감치 집을 나가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가 된 딸이 뉴스화면을 통해 사건을 접하고 고향집으로 내려와 수사를 펼친다는 전개도 긴장감 있다. 물론 사건 해결과정이 수사극이나 법정물로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흠결이다. 뭐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만한 평가일 것이다. 찬반이 엇갈리는 것은 결말이다. 결말은 관객의 기대와 어긋나는데, 이 어긋나는 지점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감상의 포인트가 달려있다.

◆ 가족의 복원이 아닌 살부(殺父)의 메시지

아마도 다수의 관객들이 기대한 것은 냉대 속에서 집을 나간 정인(신혜선)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집에 돌아와 가족을 위기에 빠뜨린 외부의 적에 맞서 싸우고, 진실을 밝혀 해체되었던 가족을 복원하는 서사였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위증을 하고, 정인의 수사를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고, 카지노를 둘러싼 추시장(허준호)의 이권이 드러날 때 대게 그런 이야기로 흘러가길 예상한다. 또한 관객들 중에는 영화의 결말을 ‘절절한 모성애의 강조’로 받아들이고 대략 슬프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감상을 마무리하며, 다소 찜찜한 뒷맛을 삭이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장르적인 감상법을 따라가다가 약간 실망한 관객들과, ‘모성 신파’로 받아들여 시큰함에 젖은 관객이 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결백>이 결말을 통해 밝히는 것은 어머니의 결백이 아니며, 가족의 복원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그런 모성 신파로 감동을 주려는 엔딩도 결코 아니다. 영화의 결말이 가리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문제적이다. 바로 나쁜 아버지 죽이기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두 번 죽임을 당한다. 지아비를 생물학적으로 살해하는 아내에 의해. 그리고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는 딸에 의해.

<결백>은 여러 논쟁적인 작품들을 떠오르게 한다. 일단 수사극의 서사에서는 <마더>를 떠올리게 한다. 또는 거창한 지역 정치의 밑밥을 깔고서, 정작 결말은 나쁜 가부장을 응징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밀은 없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한편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는 <돌로레스 클레이븐>을 닮았다. 모녀 관계의 균열, 누명을 쓴 어머니, 폭력 남편의 처단, 딸이 어머니를 변호하고 화해에 이르기 등이 닮았다. 하지만 주제의 측면에서 가장 유사한 텍스트는 <화이>이다. <화이>가 남성 주체에게 저 나쁜 아버지가 친부가 아님을 깨닫고, 나쁜 아버지를 죽여라라는 혁명적인 메시지였듯이, <결백>은 여성 주체에게 저자는 너의 친부가 아니다. 네 아비를 죽여라는 급진적인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 나쁜 아버지와 남성연대

아버지는 정인에게 끔찍한 차별과 학대를 가했다. 어린 정인이 남동생을 업고 설거지를 하다가 뒤로 넘어져 동생이 다친 것을 두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발달장애아로 만들었다며 매질을 해댔다. 여상을 나오고도 특출한 머리로 서울 법대에 붙게 되었지만, 서류를 찢어버리며 못 가게 했다. 딸이 떠난 후 구들목 장군으로 방구석에서 술이나 퍼마시다 죽었지만, 아버지는 한때 잘나가는 인사였다. 채석장 사장이었고, 금광 사업을 하다 망했으며, 선거에 나가려 했다. 젊은 시절부터 추시장을 비롯한 동네 유지들과 꽤 돈독한 관계였는데, 거실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수영복 차림의 단체 사진은 남성연대를 한껏 과시한다.

영화 <결백>은 이 남성연대에 주목한다. 이들은 동네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며 형님 동생 하고 있지만, 이권을 위해 살인도 마다 않는 추악한 자들이었고, 죄로 맺어진 공범의식을 통해 남성연대를 돈독히 했다. 그런데 그 남성연대 안에서도 균열이 생겼다. 아버지는 그들 내부에서 속고 따돌림을 당했으며 결국 내쳐졌다.

요컨대 아버지는 집에서 아내의 삶을 몰수한 채 딸을 핍박하는 자이고, 밖에서는 죄로 맺어진 남성연대를 통해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순간 내쳐진 흔한 남자이다. 그 아버지와 친구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한번은 화자에 의해 생물학적으로 죽고, 두 번째는 정인에 의해 상징적으로 죽는다. 정인은 마침내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지만, 고민 끝에 남성연대 내부에서 일어난 균열과 배신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살인자가 되었고, 남성연대는 이권에 의해 서로 속이고 죽이는 추악한 집단임이 폭로되었다. 정인은 엄마의 결백을 믿느냐는 검사의 말에 “엄마는 이미 대가를 치렀다.”고 답한다. 물론 이는 법조인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개별적 사건의 사실관계가 아니라, 거시적 맥락의 본질에 집중하면 진실은 정인이 내놓은 결말에 가깝다.

◆ 상징적 친부의 소환과 소수자 남성과의 연대

영화 <결백>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현실의 아버지와 그가 속한 남성사회의 죄상을 폭로하며, 주류 남성들이 집에서든 밖에서든 저지르는 죄를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네 아비들의 세계를 고발하고, 아내로서 딸로서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가상의 친부를 상정한다. 물론 네 아비가 죽인 태초의 착한 친부는 상징적으로 소환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저 추악한 아비의 친자식이 아니다라며 현세의 계보를 절연해내고, 내가 속하고픈 상상적인 근원을 세우는 일은 필요하다.

발달장애인 정수(홍경, 그의 연기는 발군이다)의 존재도 상징적이다. 아비는 친아들인 정수를 정인과 다르게 대했다. 엄마는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흐릿한 정신으로 아들 밥을 해줘야 한다며 나설 만큼 정수를 끔찍이도 챙긴다. 정인은 정수를 향한 엄마의 애착이 지긋지긋해서 그놈의 정수, 정수!” 하며 진저리를 친다. 성차별이 심한 가정의 딸들은 오빠와 남동생을 가부장제의 수혜자로 여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인은 엄마와 정수를 차에 태우고 고향을 떠난다. 이는 정인이 정수를 차별의 수혜자로 보지 않음을 뜻한다.

발달장애인인 정수를 나쁜 아버지들의 세계의 일원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수는 힘과 서열을 위주로 하는 주류 남성 세계에 편입될 수 없다. 조롱당하거나 얻어맞을 뿐이다. 그는 맞을 때마다 번개처럼 반격하며 우리 엄마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런 장면은 그가 집안의 기대를 받는 장남이 아니라, 핍박당하는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정인은 정수를 가부장제의 수혜자가 아닌 사회적 약자로 보기 때문에, 연대의 대상으로 여긴다. 정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외부인에게 맞서 두들겨 맞은 정수를 안타깝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계획 속에 정수를 참여시킨다. 정수는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목격했지만, 어머니를 위해 증언함으로써 아버지와 그 친구들편이 아닌 어머니와 누나의 편에 서게 된다.

영화는 네 아비를 죽이고, 네 아비의 세계를 자멸에 빠뜨리고, 네 어머니를 구하라는 도저한 명령을 내린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남성연대에 물들지 않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라는 메시지도 담는다. 각성한 남성감독이 동시대 여성들에게 전하는 가장 급진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결백’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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