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최고의 '로코' 달인은?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원래 이 칼럼은 ‘로맨틱코미디의 달인’이란 제목으로 쓸 계획이었다. 수많은 로맨틱코미디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가장 코로물의 여주인공에 잘 어울리는 배우가 누구일까 찾아가는 글이었다. 하지만 아뿔싸, 마냥 쉽게만 생각했던 이 칼럼은 도저히 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만일 악녀의 달인이나 복수녀의 달인이란 제목이었다면 쓰기 쉬웠으리라. 멜로물의 달인이란 제목이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에 조사를 거듭한 결과 로코의 달인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어보자. 악녀의 달인, <샐러리맨 초한지>의 김서형. 악녀의 성깔은 물론 내면까지 알차게 보여준 그녀의 연기에 불만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복수녀의 달인, <인어아가씨>와 <아내의 유혹>에 장서희. 따라갈 사람이 없다. 멜로의 달인, 여기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긴 하겠다. 하지만 <연애시대>의 손예진 정도라면 반대의견이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본다. 이처럼 악녀, 복수녀, 멜로물 여주인공에게는 대중이 기대하는 바가 뚜렷하다. 배우들은 그 캐릭터에 배우 자신의 개성을 입혀 표현하기만하면 최소 백점 만점에 구십 점은 맞을 수 있다.

반대로 로코물의 달인은 찾기가 힘들었다. ‘연애’란 단어는 두 글자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그 단어에 기대하는 감정은 세상에 수많은 꽃송이만큼이나 너무 다르다. 누군가는 달콤한 방식의 연애를 꿈꾸고, 누군가는 쿨한 연애를 꿈꾸고, 또 누군가는 현실적인 연애를 바라는 반면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스펙터클한 연애를 바라는 이도 있다. 멜로물은 이중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연애의 모습만 취하면 된다. 멋지고 아름다운 남녀 주인공이 하나의 방식으로 꾸준하게 사랑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로맨틱코미디는 보여줘야 하는 연애감정의 코드가 멜로보다 더 깨알 같고 복잡하다. 연애의 구질구질한 일상사를 반죽삼아 로맨스의 설탕가루를 뿌려 결국 유머코드를 토핑으로 얹어 달콤한 사랑케이크로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로코물의 남자배우들은 의외로 연기하기가 쉬울지 모른다. 그들은 이상적인 모습 몇 가지만 보여주면 끝이다. 복잡할 필요 없이 웃기거나, 철없거나, 자상하거나, 나쁘거나 한 가지 성격만으로 충분하다. 대신 허우대는 멀쩡해야 팔십 점은 먹고 들어간다.



반대로 로코물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움직이는 것은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완벽하고 청순한 멜로물의 여주인공과는 전혀 다르다. 멜로물의 여주인공이 드라마가 시작할 때부터 세공이 끝난 다이아몬드반지이자 쇼윈도에 걸린 드레스라면 로코물의 여주인공은 원석이자 가봉만 마친 드레스다. 그래서 멜로물의 여주인공처럼 슬프거나 사랑스러운 표정만 지어서는 성공을 이룰 수 없다. 로코물의 여주인공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십계명보다 더 어려운 모순적인 로코계명들을 알아서 잘 수행해야 한다.

털털하되 칙칙해서는 아니 된다. 예쁘되 너무 아름다워서는 아니 된다. 남 보기에 매력은 있으되 너무 요염해서는 아니 된다. 현실적인 인물이되 너무 현실적으로 궁상맞으면 아니 된다. 내성적일 수 있으나 내숭적이서는 아니 된다. 발랄하되 귀여운 척으로 보여서는 아니 된다. 엉뚱한 성격이 있으나 정말 미친 것처럼 보여서는 아니 된다. 남자주인공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 도도하되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아서는 아니 된다. 패션 센스가 없어 보이되 정말로 옷을 못 입어서는 아니 된다, 등등등등.

게다가 귀여움, 털털함, 예쁨, 발랄함, 매력 있음 등등의 기준은 워낙에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 사실 딱 잘라 말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니 로코물의 여주인공은 스포트라이트는 받지만 원성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 같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의 김하늘은 로코물의 여주인공 미션을 맡아 수행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다른 여자 캐릭터들이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여주인공 서이수는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다. 학교에 있는 예쁜 여선생님 정도의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 약간은 엉뚱하고 발랄하지만 소심한 성격. 이 전형적인 인물을 살려내는 김하늘은 찬사도 받지만 동시에 오버 연기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척하려 애쓴다, 등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가 멜로물이었던 <90일, 사랑할 시간>에서 연기할 때는 지적되지 않았던 단점들이었다.



드라마 <빅>의 여교사 길다란 역을 맡은 이민정 역시 대중들 눈에 탐탁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혀 짧은 소리, 맹해 보임, 달달한 감정을 못 살림 등등. 물론 그녀가 조연으로 출연했던 <꽃보다 남자>에서 여주인공 구혜선이 들었던 꽃다발로 맞은 것 같은 원성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말드라마 <그대 웃어요>에서의 그녀 연기가 <빅>과 비슷함에도 자연스럽고 귀엽다 정도로 평가받았던 것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삼순이 현상까지 일으킨 김선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 경우는 오히려 로코물의 캐릭터가 배우를 집어삼킨 케이스다. 멜로나 악녀 캐릭터는 쉽게 벗어던질 수 있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공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대중들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성격을 지닌 로코물의 여주인공은 그 캐릭터와 배우가 너무 딱 맞아떨어지면 귀신처럼 그 배우에게 들러붙는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배우가 동일인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는 뜻이다. 긴 세월 동안 배우 김선아는 삼순이 캐릭터 빙의에 시달려야 했다.

최근 드라마 <아이두 아이두>에서 김선아는 일은 딱 부러지게 잘하지만 속은 여린 황지안이란 캐릭터를 섬세하게 살려나가고 있다. 표정과 대사, 그리고 패션코드까지 모두 황지안의 완벽한 맞춤옷이다. 하지만 그 맞춤옷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평가 기준은 ‘이제야 삼순이 캐릭터에서 벗어났네’ 정도가 다수인 것 같다.

결국 드라마마다 각기 다른 개성적인 인물로 등장하면서도 대중들의 환호만 받는 로코의 여주인공을 나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로코의 달인을 찾는 이 칼럼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기로 마음먹었다.
(※로코의 달인이란 생각하는 인물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간단하게 첨부해 주세요. 우리는 누구나 한 줄 칼럼니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K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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