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원작 속 시월드가 살아 숨쉬는 영리한 각색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TV삼분지계]를 통해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2017오늘의 우리 만화상수상에 빛나는 수신지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 순진무구한 그림체로 한국의 며느리라면 다 한 번씩은 겪어봤을 악몽을 그려낸 걸작이다. 남편도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고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인자하신 분들 같은데, 주인공 민사린은 끊임없이 지치고 주눅이 든다. 무씨네 집안에서 자기는 일만 열심히 하고 자리를 인정받지는 못하는 사람 같고, 선의로 마음을 쓰면 그걸 당연하게 받는 듯한 사람들의 반응에 사린은 천천히 시들어 간다. 사람이 특별히 나쁜 게 아니라면,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카카오TV가 원작의 에피소드들을 20분 남짓 한 숏폼으로 옮겨낸 드라마 <며느라기>는 원작이 밟아온 길을 충실히 따라 걷는다. 박하선과 권율의 생육을 입은 민사린과 무구영은 한결 더 가까운 존재로 느껴지고, 그림으로 볼 때에도 소름 끼쳤던 에피소드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호연은 숨이 막힌다.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는 <며느라기>를 어떻게 봤을까? “무려 40년 가까이” ‘며느라기가 안 끝나고 있다는 정석희 평론가는 며느리 입장에서 백 번 천 번 공감 가는, 속 시원한 얘기라고 호평을 보냈고, 김선영 평론가는 드라마화 하기 어려웠을 원작의 구조를 매만져 솜씨 좋게 20분 안에 담아낸 영리한 각색을 칭찬했다. 이승한 평론가 또한 드라마판 만의 미장센이나 카메라 워킹이 원작의 메시지를 더 강조하고 있다며 호평을 보냈다.

*추신: 원작의 10화 말미에 붙은 특별만화 묻지 마세요에서, 웹툰 <며느라기>를 인상 깊게 본 남편/시누이/시어머니는, 아내/새언니/며느리에게 묻는다. 그래도 우리 집은 그런 집은 아니지 않느냐고. 드라마를 보는 우리도, 함부로 속 편한 질문을 건네지 말자. 집집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다.

◆ 왜 남의 핏줄을 데려다 도리를 강요하는가

비슷한 여건에서 태어나 비슷한 길을 걸어온 남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나면 처지가 달라진다. 이상한 일이지. 결혼식 날 며느라기를 받겠느냐는 주례의 질문에 민사린(박하선)라고 답했다. 그렇게 멋모르고 발을 들여 놓은 며느라기’. ‘사춘기갱년기처럼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증세가 아니라는 걸 아직 사린은 모른다. 나의 며느라기는 무려 40년 가까이 진행 중이다. 민사린이 들은 설거지 그만하고 이리 와서 밥 먹으라는 빈말을 지금껏 듣고 있으니까. 스스로 생각을 고쳐먹지 않는 이상 상황은 결코 바뀌지 않으리라. 나 이외의 사람들은 불편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왜 너나없이 자식 결혼만 시키면 생일상 타령을 할까? 나를 낳고 길러준 엄마를 위해서는 미역국 한번을 끓인 적 없는 이도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 생일상을 차려 내야 한다. 그게 며느리 도리란다. 왜 남의 핏줄을 데려다 도리를 강요하는가. 더 기막힌 건 차례며 제사상도 며느리 몫이라는 점.

며느라기에서 벗어난 큰 며느리 혜린(백은혜)의 당당함에 놀란 사린이 남편 구영(권율)에게 형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구영의 답은 나쁜 분은 아닌데 그냥 형수님 인생을 사는 분이야. 엄마도 형이랑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사실 이게 정답이다. 자기 조상, 자기 부모는 부디 각자 챙기자. <며느라기>는 며느리 입장에서 백 번 천 번 공감 가는, 속 시원한 얘기다. 하지만 오늘 당장 시어머니가 된다 해도 어색하지 않은 내 입장에서 보면 이건 아니지 싶은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시어머니 생일상 차리겠다고 미리 전날 와서 자는 장면, 시어머니 입장에선 질색, 또 질색인 것을.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원작의 미덕을 고스란히 되살린 영리한 각색

많은 호평과 대중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웹툰 <며느라기>는 드라마화하기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극성이 강한 장르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수효과로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작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일견 평온한 것처럼 느껴지는 일상 속의 미세한 차별을 포착한 데 있기에, 각색에서도 그 미덕을 살려야 했다.

다행히도 드라마 <며느라기>는 이 난제를 현명하게 극복한다. 20분 내외의 숏폼 안에 원작의 에피소드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도입부와 결말부에는 주제의식을 압축한 장면들을 배치해 핵심 갈등을 더 선명히 한다. 가령 첫 회에서는 태어난 순간부터 성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남과 여의 성장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시어머니 생신상 에피소드를 마친 뒤의 결말 부분에서는 사린(박하선)이 회사 여성 동료들과 펼치는 일종의 후토크를 통해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저격한다.

2회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사린과 구영(권율)의 연애시절 이야기는, 대망의 큰며느리 혜린(백은혜) 에피소드를 통해 목격한 불합리한 가족제도를 향한 분노를 더욱 극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원작의 미덕을 고스란히 되살린 영리한 각색이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 원작보다 더 노골적인 어조, 더 선명해진 메시지

명절이라 차들이 빠져나가 조용해진 서울, 사랑하는 젊은 연인이 만난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지만 남자는 생각이 복잡하다. 집을 나서기 직전, 왜 명절 일은 여자들만 하고 남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술을 마시거나 자기 일을 보는 거냐며 엄마에게 따져 묻던 형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남자는 생각한다. “엄마, 조금만 기다리세요. 결혼하면 사린이는 다를 거예요. 사린이는 착하니까.” 남자 혼자 애틋한, 끔찍한 동상이몽의 현장이다.

수신지 작가의 동명 원작 웹툰 <며느라기>의 가장 탁월한 점은, 주인공 민사린의 남편 무구영이나 시댁 식구들이 특별히 사악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린의 고통은 시댁 식구들이 아침 드라마 속 악역들처럼 며느리 뺨을 때리는 사람들이라서 생기는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결혼해서 한 식구가 되면 으레 그러는 거니까사린이 차린 밥을 기다리며 편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이 좋고 나쁘고의 차원이 아니라, 여자는 순종적이어야 하고 며느리는 자신을 죽이고 시댁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가부장제 질서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며느라기>는 탁월하게 고발한다.

드라마는 웹툰보다 더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원작이 후반부 에피소드로 선보인 구영(권율)의 형수 혜린(백은혜)의 명절 에피소드는 전진 배치되었고, 시어머니 기동(문희경)의 아침상을 차리고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느끼는 사린(박하선)의 뒷모습은 달리 아웃-줌 인의 카메라워킹을 통해 더 노골적으로 강조된다. 사린과 구영 사이의 거리감을 강조하는 미장센은 초반부터 효과적으로 두 사람의 인식 차이를 보여준다. 뚜렷하진 않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공포가 안개처럼 밀려들어 더 무서운 원작의 매력이 다소 감소한 듯해 조금은 아쉽지만,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와 웹툰의 문법은 다르고, 이래야 간신히 알아듣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사진=카카오TV,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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