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글의 법칙’, 조작 논란보다 더 무서운 것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정글의 법칙>은 예능의 덕목을 ‘웃겨야 산다’에서 ‘삶’의 영역으로 넓힌 선구자다. 예능에서 추구하는 재미가 단순히 웃기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감정과 볼거리일 수도 있고, 그것이 예능이란 카테고리에서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첫 사례였다. 그러던 <정글의 법칙>이 벌써 노쇠한 것일까. ‘정글의 법칙 in 히말라야 편’이 끝나가고 있음에도 반응은 조용하다. 시청률은 여전히 금요일 예능 중 1위를 고수하고 있지만 방송 전후로 아무런 이슈를 만들지 못했다. 한때 방송 전후로 실시간 검색어와 연예 면을 독식하고 자사 토크쇼에 PD까지 출연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따지고 보면 올해 2월 박보영 소속사 대표가 야기한 ‘조작’ 논란 이후 화제의 중심에 <정글의 법칙>이 다시 선 것은 지난 주말 노우진의 결혼 소식이 처음이다.
‘조작논란’은 <정글의 법칙>에게 펀치를 날렸다. 이후 제작진은 조작 논란을 의식한 듯 흥미진진한 모험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고생담으로 코드를 전환했다. 그러면서 이번 히말라야 편은 ‘생존’보다 야생동물 관찰하는 것이 주된 미션이었고, 아찔한 절벽길을 통해 산행하는 야크카라반을 떠났다. 태평양 바누아투의 한 무인도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 궁리를 하던 생존 모험이 가이드와 안전요원 대동 하에 정해놓은 코스를 탐방하는 국토대장정 순례 같은 극기 여행이 된 것이다. ‘조작 논란’ 때문에 카메라 밖에 있어야만 했던 촬영 스케줄과 제작 방식, 안전요원의 존재 등등이(물론 촬영장에 안전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시청자들이 그것을 알아야 하는 가는 별개의 문제다) 너무 많이 노출된 결과다.
이런 변화 때문에 최근 재난 영화나 좀비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존’과 ‘모험’에 대한 갈망을 <정글의 법칙>에서는 더 이상 찾기 힘들어졌다. 문명의 이기가 사라진 세상, 지금 살아가던 모든 편리 도구가 없는 환경에서 내 몸과 감각과 본능에 의존해 생존해나간다는 판타지에 너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가이드라인이 그려진 것이다. 오지의 풍광과 야생동물의 모습을 포착하고, 현지인들과 어울리려 축구하는 것만으로는 <정글의 법칙>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신선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조작 논란이 카운터 펀치는 아니다. <정글의 법칙>이 회를 거듭할수록 시청자들의 관심을 잃는 것은 모험심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험심이 약화된 것은 병만족이 함께 고생하고 역사를 나누는 고정멤버체제에서 게스트 위주로 흘러간 것이 결정타였다. 특히 이번 히말라야 편은 계속 흩어져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캐릭터나 함께 생활하면서 만들어지는 시너지가 부족하다보니 게스트의 존재감도 사라졌다.

생존 판타지의 근간을 마련하는 모험심은 <정글의 법칙>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였다. 김병만이란 생존 전문가 못지않은 인물의 존재는 자신을 대입해 감정이입을 하기에도, 병만족과 내가 함께 있다는 상상하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매번 병만족이 새로 꾸려지는 와중에 너무나 많은 게스트가 참여하고 고정 출연진이 흔들리면서 함께 떠나는 ‘모험’에 대한 감정이입의 순도가 떨어졌다.
고정 멤버로 병만족을 꾸리면 함께한 시간이 길면 긴만큼 성장 코드로 다가갈 수 있고, 협동해 뭔가를 만들 때 느껴지는 동료애와 연대의식이 진해지며,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반면 게스트를 활발히 활용하면 새로운 인물이 가져다주는 매력과 새로운 관계 형성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게스트를 부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문제는 생존 경험이 없는 게스트들이 매번 함께하다보니 게스트를 비춰주는 방송분량과 별개로 정작 사냥에서 은신처 마련, 멤버들 돌보기까지 생존과 관련된 일은 대부분 김병만 혼자서 하게 된다는 데 있다.
고정멤버인 노우진과 박정철은 활력소가 되는 멤버이긴 하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다. 경험과 능력을 갖추고 김병만과 생존 전략을 함께 모색하고 일을 분담해서 해결할 사람이 없다. 처음엔 티격태격했지만 서로 인정하고 함께 고생하며, 김병만이 유일하게 의지했던 리키 김이 빠지면서 모든 것이 김병만에게 과도하게 쏠렸다. 이런 상황에 생존 모험은 불가능하다.
이는 공교롭게도 <정글의 법칙>의 자장 안에서 태어난 지금 <일밤>의 승승장구와 대비된다. 다큐성 예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애다. 시청자들은 아무래도 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다양한 개성이 모여 작은 사회를 이루는 특정한 커뮤니티를 지켜보면서 재미를 느낀다. 함께 생활하고 고생하면서 각자의 매력이 드러나고, 그 매력이 어우러지면서 성장하는 것은 연속성 있는 스토리와 감정이 쌓일 때 가능한 것이다.

<진짜 사나이>의 멤버들은 함께 부대를 옮겨 다니며 추억거리를 쌓아가지만 <정글의 법칙>은 또 다른 여행을 떠날 때마다 멤버가 계속해서 바뀐다. 그 결과 생존 능력과 경험이 월등한 김병만의 무용담만 늘어날 뿐, 병만족의 존재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함께 힘을 모아 살아남기 위해 떠나는 모험은 어느덧 김병만과 함께하는 오지 여행이 되어버렸다.
<정글의 법칙>에 대한 문제제기에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시청률은 여전히 14%대로 동시간대에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으니 위기를 들먹이기 곤란한 수치다. 그러나 문제는 <정글의 법칙>을 기다리며 열광했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또 어떤 곳으로 떠나서 새로운 모험이 펼쳐질지, 병만족이 어떻게 힘을 모아 위기를 해쳐나갈지, 시청자들의 두근거림과 설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정글의 법칙> 팀이 다음 번 여정지인 ‘벨리즈’로 촬영을 나갔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었는가?
같은 금요일 밤에 집중 포진된 종편과 케이블의 간판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은 <정글의 법칙>에 비해 현저히 낮지만 훨씬 많이 이슈가 되고 회자되는 것은 눈여겨봐야 할 현상이다. 단순히 시청률만 놓고 태평성대를 논하긴 찝찝한 시대다.
<정글의 법칙>은 계속되고 있지만 새 여정지마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매번 새로 시작한다. 시청자들은 이미 베테랑이 됐지만, 매번 새로 조합되는 병만족은 늘 초보다. <정글의 법칙>은 매번 ‘새로운 것’에 대한 고민에 부쳐서인지 정작 시청자들과 함께 쌓아가는 역사를 등한시 하면서 모험이란 판타지를 잃었다. 시청자들은 이미 이만큼 봐왔지만 <정글의 법칙>은 늘 반복, 그리고 또 반복하고 있다. 힘든 여정을 보고 감탄할 순 있지만 판타지를 느끼긴 힘들다. <정글의 법칙>이 찾아야 하는 초심은 진지한 고생이 아니라 생존의 모험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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