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온’, 주인공 4인방의 로맨스는 인생의 휴식처럼 다가온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JTBC 수목드라마 <런 온>에서 2004년의 대히트작 <파리의 연인>이 떠오르는 것은 로맨스 구조가 닮아서가 아니다. <파리의 연인>의 로맨스가 주인공들에게 인생의 절정이라면 <런 온>의 로맨스는 인생의 휴식처럼 다가온다. 로맨스적 관점에서 2004년과 2020년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런 온>의 로맨스는 인생이 추운 청춘들이 그나마 겨우 온기를 느끼는 따스한 핫팩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게 전부다. 더구나 기선겸(임시완)이나 오미주(신세경), 서단아(수영), 이영화(강태오)에게 그들의 인생에 비해 로맨스가 월등히 중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네 주인공 모두 그들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바란다. 혹은 김선겸의 경우 그의 아버지 기정도(박영규)로 대표되는 꼰대들의 세계가 조금은 허물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런 온>의 주인공들이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드라마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사에게 느껴지는 어투의 촉감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약점을 툭툭 건드리며 빠르게 주고받는 티티카카대사들. 그리고 대사에 토핑처럼 끼어드는 비유와 상징. 이런 부분들이 <파리의 연인> 혹은 김은숙표 로맨스물과 닮은 점인데, 2004년과 다른 점이라면 딱히 이런 느낌의 대사가 새롭지는 않다는 것. 작위적이거나 그저 말장난처럼 느껴져 유통기한이 지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결국 <런 온>의 승부는 2004년의 주인공과 다른 기선겸과 오미주, 서단아, 이영화를 얼마나 개성 있게 만들 수 있는가였다. <런온>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번역가인 오미주가 겪는 누구보다 스마트하지만 누구보다 비루하게 살아가는 청춘의 서사는 뭔가 아리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재벌집 자손인 서단아와 평범한 미술학도 이영화의 로맨스에도 일정 부분 독특한 매력이 있다.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여성과 감성적이고 잔망스러운 남성이 그려가는 로맨스가 생각보다 흔치는 않으니까. 그리고 육상 선수인 기선겸이 겪는 스포츠계의 비리와 선후배간 폭력 사태를 다루는 부분은 로맨스물과 사회비판 드라마가 함께 갈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극적인 사건이 해결된 후에 <런 온>은 중거리경주에서 속도를 내다 막판에 힘이 빠지는 인상이다. 중심이 되는 사건 없이 그저 네 인물 사이의 로맨스와 기선겸과 그의 아버지의 대립 정도로 드라마의 각을 잡는다. 솔직히 그렇게 흥미로운 구도는 아니다.

박영규와 차화연이라는 연기 잘하고 센스 좋은 중년배우들을 섭외했지만 이들의 역할 또한 생각보다 많지 않다. 분량이 적어서가 아니라 지극히 기능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박영규는 기선겸의 아버지라는 대립각이자 악의 축으로만. 차화연은 1980년대 전설의 여배우 육지우 역할을 맡았지만, 초반의 흥미로운 이 인물은 평범한 시어머니 느낌으로 변해 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로맨스를 진행시키는 낡고 느끼한 대사들이다. 그런데 <런 온>의 대사는 그리 매력 없지만, 네 명의 배우들이 이 대사를 통해 만들어내는 로맨스의 분위기는 매력 있다. 일단 캐릭터 자체가 젊은 층에 공감 가는 면이 있기도 하고, 배우들 또한 이 캐릭터들을 잘 살려내기 때문이다.

아마 임시완이 아니었다면 기선겸은 평범하고 단순한 운동선수 남성의 캐릭터로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시완은 로맨스의 전형적인 남주와는 미묘하게 충돌하면서도, 이상하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유형의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임시완이 아니었다면 기선겸이 꼰대 어른들과 부딪치며 그려내는 갈등구조가 섬세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신세경은 <런 온>을 통해 낡은 대사를 그녀의 어조나 말투, 느낌으로 그 세대에 맞는 대사들로 바꿔낸다. 물론 신세경 특유의 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신세경의 연기 덕에 대사가 지닌 낡은 느낌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신세경은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런 온>에서 별 것 아니지만 위로가 되는 힐링 로맨스의 분위기를 잡아내고 이끌어가는 무거운 역할을 굉장히 잘 소화하고 있다.

한편 <런 온>의 서단아는 배우에 따라 자칫 빤하게 그려질 수 있는 캐릭터였다. 재벌가의 영리하고 냉정한 손녀가 주는 상투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수영은 이런 상투성을 피해가면서 이 서단아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건 아마 섬세한 생활연기 덕일 것 같다. 그렇기에 사업에서 냉철하지만 로맨스에 미묘하게 끌리는 모순적인 감정들을 납득가게 굉장히 잘 그려냈다. 모범답안 같은 연기지만 때로는 모범답안이 그 인물을 잘 보여주는 정답일 수 있다.

서단아와 로맨스를 그려가는 이영화는 어쩌면 가장 느끼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강태오는 본인 캐릭터의 느끼한 대사들을 때로는 담백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눙치면서 매력적으로 연기했다.

또한 네 명의 배우들 모두 또래 젊은이들이 공감할 법한 로맨스의 느낌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자와 기사는 없지만, 누군가 의지하고 수다 떨고 지친 내 얼굴을 드러내며 함께 달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를 이용하고 나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는 않는 그런 사람과의 로맨스. 그렇기에 이 특별할 것 없는 <런 온>의 로맨스에 누군가는 공감대를 느끼고 또 위로를 받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JTBC,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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