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망’, 젊음도 외국인도 모르는 이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기대를 무너뜨리는 착잡한 완성도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남지우·이승한·정석희 세 명의 TV평론가가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TV삼분지계]를 통해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한국 시트콤의 황금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순풍산부인과>, <뉴 논스톱>, <하이킥> 시리즈의 제작진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청춘 시트콤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는 두근거림을 안겨준다. 넷플릭스가 공개한 첫 오리지널 한국 시트콤이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국제도시로서의 서울을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 또한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는 요소였다. 지난 18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이야기다. 서울 소재의 ‘대한대학교’ 국제기숙사에 살고 있는 세계 각국 출신의 대학생들이 경험하는 좌충우돌 청춘 스토리라는 설정은, 익숙함과 새로움 모두를 잡을 수 있는 묘안처럼 보였다.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가 함께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실망이었다. <순풍산부인과>, <뉴 논스톱>, <하이킥>을 만든 제작진의 감성은 불행히도 그 시절에 멈춰 있는 듯 보인다. 극 중 등장인물들과 가장 연령적 격차가 적은 남지우 평론가(“대학교 기숙사에 문화체험을 하러 온 이들은 여기 외국인 유학생들이 아니라 제작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부터, 연령적 격차가 가장 크게 나는 정석희 평론가(“빤하다 못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까지,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제작진이 자신들이 묘사하는 대상인 청춘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지적했다.

국제기숙사라는 설정조차 잘 살았는지 회의적이다. 정석희 평론가는 “외국인을 잘 모르는 이들의 외국인 이야기”라고 평했고, 이승한 평론가는 “그 어떤 문화적 충돌이나 이방인으로서의 고충도 겪지 않는” 인물들로 가득한 이 이야기의 기저에는 한국이 자국에 대해 지닌 자아도취가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 나도,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나도”라고 대답할 뻔했다. 이런 타이틀이야말로 2020년대를 살아가는 또래들의 시대정신이 아닐까, 영어 제목(‘so not worth it’)마저도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공개 일자를 기다렸다. <하이킥> 이후 9년만, <감자별> 이후 7년 만의 ‘청춘 시트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돌아왔을까.

첫 시즌, 총 12부작.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구망>의 만듦새는 이 최고의 작명을 결코 따라가지 못했고, 많은 부분에서 실패를 기록하고야 말았다. 특히 시리즈 3분의 1지점까지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말투의 대사들(ex. “완전 존잘에 왕자님 간지”)이 난무하는 것을 보며, 대학교 기숙사에 문화체험을 하러 온 이들은 여기 외국인 유학생들이 아니라 제작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적어도 청춘을 내세우는 작품이라면, 전작을 대히트시킨 유구한 커리어의 경력직보다 젊음과 대학의 기억에 가까이 있는 신입이 더 잘 할 수도 있지 않았까, 넷플릭스는 왜 더 아래에 기회를 나누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투정 어린 마음이 시청 내 일기도 했다.

디테일의 조악함을 견뎌내며 <지구망> 시청의 끝에 다다르면, 그래도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시트콤 장르의 진면모도 감지할 수 있다. 세완(박세완)과 제이미(신현승)라는 두 주인공이 서사의 줄기에서 뒤로 약간 물러나는 시점(9화)부터, 이 장르의 진짜 매력이라 할 수 있는 탈중심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변 인물들에게도 상황과 관계성이 더해지고, ‘대한외국인’으로 뭉뚱그려 묘사되었던 각 캐릭터들의 존재 이유가 해명되기 시작한다.

한국식 러브라인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미국인 카슨의 단단한 태도, 성 정체성을 둘러싼 고민에 첫발을 내딛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인 테리스의 이야기가 급부상하는 가운데, ‘현민’을 연기한 배우 한현민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순 없다. 우리가 사랑했던 <하이킥> 시리즈의 연기톤을 그대로 물려받아 열연하는 그를 보면, 10대였던 모델 한현민이 어른이 되어 배우로 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만든 작품이 바로 <지구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시트콤이 우리에게 돌아오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Instagram @jmbar_jwjw

◆ 청춘도 외국인도 잘 모르는 이들의 새롭지 않은 이야기

뚜껑이 열리기에 앞서 MBC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 <뉴논스톱>, <하이킥> 시리즈, SBS <순풍 산부인과>, tvN <감자별 2013QR3>, <막돼먹은 영애 씨> 등 제작진이 참여한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나열됐다. 한국형 시트콤이 돌아오길 목 늘이고 기다려온 이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짚어보면 2019년 작 <막돼먹은 영애 씨 17> 외엔 시간이 꽤 흘렀다.

재기발랄한 감성으로 인기를 누린 바 있는 그때 그 제작진들도 나이 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한 마디로 이미 짠내 나는 청춘이 아닐진대 여전히 참신한 이야기가 가능할까? 선입견을 가졌음을 반성하는 쪽으로 전개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아쉽게도 그럴 수 없다. 요즘 대중은 불필요한 에피소드는 배제하고, 러브 라인에 시간낭비 안하고, 주제에 한껏 충실하지만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시간 순삭인 마성의 드라마를 원한다. 작은 반짝임에 열광하던 과거의 순진무구한 시청자들이 아닌 것이다.

 

끊임없는 실수와 오해로 점철된 에피소드들, 억지 반전, 도무지 새로움이 없다. 새롭지 않은 건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관계 형성이 된 건 주인공 정도인데 ‘박세완’(박세완)은 <논스톱>의 생활력 강하고 억척스러운 ‘경림이’(박경림) 같은 인물이고 할리우드 배우의 입양한 아들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사는 ‘제이미’(신현승)는 <논스톱>의 조인성과 엇비슷한 성정을 지녔다. 둘 사이가 러브라인으로 발전하는 것도 같다. 혼술 끝에 만취한 세완이 제이미에게 속내를 털어 놓는 장면은 빤하다 못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대학 국제 기숙사가 배경인 이 드라마, 청춘을 잘 모르는 이들의 청춘 이야기, 더 나아가 외국인을 잘 모르는 이들의 외국인 이야기이지 싶다.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넷플릭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이하 <지구망>)의 기본 설정은 영화 <스페니시 아파트먼트>(2002)를 떠올리게 만든다. 유럽연합이 각국의 기존 화폐를 유로화로 전격 교체했던 2002년에 공개된 이 영화는, 연합의 국제적인 성격을 과시하는 동시에 각기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담은 청춘 코미디였다.

2021년의 서울 또한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국제적인 메갈로폴리스가 되었고, K-팝을 필두로 한 한국 대중문화의 힘은 전 세계에 걸쳐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서울의 한 대학교 국제기숙사에서 함께 지낸다”는 설정의 시트콤이 등장한다고 하면, 기대하는 바는 당연해진다.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청춘들이 한 공간에서 지내며, 때론 문화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늘려가면서 더 넓은 세계를 꿈꾸게 되는 내용. <스페니시 아파트먼트>가 그랬던 것처럼.

반전이 있다면, <지구망>은 그 방면에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대한대학교 국제기숙사에 살고 있는 청춘들 중 자국의 문화적 유산이나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구형 육군 활동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툭하면 ‘나 때는 말이야’를 입에 올리는 괴력과 식탐의 소유자 카슨(카슨 앨렌), K-드라마에 심취한 바람둥이 클럽 죽돌이 민니(민니), 맨날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잘난 척하는데 여념이 없는 테리스(테리스 브라운), 깐깐한 원칙주의자에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는 선비 캐릭터 한스(요아킴 소렌센) 등의 캐릭터들에서, 미국, 태국, 트리니다드 토바고, 스웨덴의 문화적 특성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타향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생기는 현실적인 문제들 – 아르바이트 문제, 비자 문제, 향수병 등등 – 은 말끔하게 제거되어 있고, 한국을 너무나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은 그 어떤 문화적 충돌이나 이방인으로서의 고충도 겪지 않는다. 알려진 작가진 중 비(非)한국인이 없다는 점은 이런 결과가 나온 까닭을 넉넉히 짐작케 만든다.

모두가 한국사람처럼 말하고 한국사람처럼 생각하는 작품이라면, 굳이 국제기숙사를 배경으로 외국인 캐릭터를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울도 이만큼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는 자부심? 아니면 그 어떤 문화적 성장배경을 지닌 사람이라도 금방 동화시킬 만큼 한국문화의 힘이 세다는 우월감? 한국사회는 그 어떤 문화적 충돌이나 편견도 가지지 않고 외국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아도취? 어느 쪽이든, 결과는 좀 민망하다. 우리끼리 되짚어 봐도 이렇게 민망한 결과는, 심지어 넷플릭스의 배급망을 타고 전세계 더빙판으로 제공 중이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힌두어, 인도네시아어, 폴란드어, 포르투갈어, 터키어, 베트남어… 미안한 얘기지만,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나?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영상=넷플릭스.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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