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진이나 출연자나 시청자 초대했으면 솜씨 좋게 밥상 차려내기를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영화나 드라마, 예능 제작진이 부러운 것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선물을,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바꿀 절호의 찬스를 손에 쥐어줄 수 있지 않나. 이보다 기회를 잘 살릴 사람이 있을까? KBS <싱크로유>의 카리나를 보며 매번 감탄한다. 어찌나 영민하고 예리한지 ‘날카리나’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KBS 주시청자 중에 그룹 ‘에스파’를 모르는 분이 꽤 계실 텐 ‘에스파’를 알리는 역할도 하는 셈이다. 카리나의 진가를 알아본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인생을 바꿀 기회를 선사할 큰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KBS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를 예로 들면 안문숙, 안소영이 합류했을 때 안문숙이 이례적으로 이혼 경험이 없었으나 캐릭터가 신선했기에 시청자가 거부감 없이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번 여름이 지난 후 두 사람이 하차하고 프로그램을 재정비했는데 한동안 정체 상태였던지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긴 했다. 그러나 ‘이게 뭐야? 이러려면 안문숙, 안소영 씨를 왜 하차시킨 거야?’ 하게 된다. 첫 번째 손님 정애리·조은숙 조합도 뜬금 없었지만 다음 타자 구혜선·김미려 조합은 기묘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다가 지난주는 마치 SBS <돌싱포맨> 같은 토크가 이어졌다. 초대 손님이 이혜정·김민희. 이건 너무 안일하지 않나? 새로운 얘기가 없는 도돌이표 같은 반복. 특히 이혜정, <같이 삽시다>에서까지 남편 바람난 지긋지긋한 과거사를 시청자가 들어줘야 하나? 지상파 주요 예능에 출연이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기회일 터, 왜 귀한 기회를 제작진이나 출연자나 이런 식으로 낭비하는지 답답하다. 하기야 그런 예가 어디 한둘인가. 제발 절실한 사람을 찾아서 선물 같은 기회를 주길.

믿고 보는 제작진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원호 PD다. 신원호 PD를 믿는 이유는 기회를 잘 살릴 인재를 찾아내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2012년 tvN <응답하라 1997>을 시작으로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8>, <슬기로운 감빵생활>,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 얼마나 많은 배우들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줬나. 일일이 말이 필요 없다. <슬기로운 의사생활2>는 시리즈이기 때문에 주요 인물이 겹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새 얼굴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첫 작품인 <응답하라 1997> 때만 해도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가 예능 제작진인지라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배우들이 출연을 꺼렸단다. 제작비가 넉넉지 않아서 출연료를 많이 줄 수 없었던 것도 섭외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일 게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의 대성공 이후 그런 면에서 자유로워졌을 텐데, 얼마든지 잘 나가는 배우를 불러 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늘 새얼굴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는 자세, 칭찬해야 마땅하다.

그와 달리 새로운 얼굴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잘 나가는 사람 모아 모아 밥상을 차리는 제작진들이 있다. 배달 어플 열어서 주문 수 가장 많은 치킨, 피자, 족발, 파스타, 떡볶이, 칼국수, 욕심껏 이것저것 불러서 차려낸 뒤죽박죽 밥상이지 뭔가. 한 끼를 때우는 데에는 그럭저럭 무난하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 상차림이다. 손님으로서는 대접 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의 놀라운 변신과 성장, 그리고 신선한 얼굴이 적절히 어우러지는 화제작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 정지인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도 인재 발굴 면에서 남다르다. 극 초반을 빛내준 정년이 언니 윤정자 역할의 오경화. 판소리라는 다소 낯선 주제에 우리가 빨리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오경화의 공이 크다. 제작사가 따로 보너스라도 챙겨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모두가 정년(김태리)이를 낙하산이라며 따돌릴 때 유일하게 따뜻하게 감싸준 연습생 홍주란 역할의 우다비. 대부분의 성장형 드라마 주인공 곁에는 이런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MBC <대장금>에서 연생(박은혜>이 같은 존재. 처음에는 홍주란도 그 정도 비중일 줄 알았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 윤정년과 허영서(신예은)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노래 실력도 출중하고 여리여리한 겉모습과는 달리 강단 있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머지않아 주인공으로 가뿐히 올라서지 않을까?

그리고 ‘도앵 선배’ 역할의 이세영.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이세영과 동명이인인데 그간 연극 무대에 주력해왔다고. 이 배역 또한 매란국극단 단장의 측근 정도인데 이세영이 선배미를 발휘하며 뚝심 있게 잘 살려내고 있다. ‘도앵 선배’가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좋다.

또 한 사람, 8회에 비로소 두드러지기 시작한 박초록 역할의 승희. 걸그룹 오마이걸의 리드 보컬이고 어릴 때 판소리를 해서 노래를 잘하리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기력은 미지수인지라 이렇게 내도록 밉상 짓만 하다가 끝이 나나 보다 했다. 그런데 웬 걸, 8회는 박초록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정년이와 파트너가 되어 합을 맞추는 연습 장면에서 정년이 연기에 빠져드는 그 눈빛, 놀라웠다. 연기 변신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연기 변신하면 문옥경 역할을 맡은 정은채도 빼놓을 수 없다. 쿠팡플레이 <안나>의 싸가지 없는 ‘이현주’가 <정년이>의 ‘문옥경’으로 변신하다니, 감탄을 금치 못할 밖에. 김태리의 뼈를 깎는 노력은 두 말하면 잔소리이겠고 정은채, 김윤혜 등등, 주역들부터 단원들까지, 얼마나 애들을 썼는지 노래며 춤이 진짜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캐릭터가 좋고 배우가 역할을 잘 살려내면 자꾸 더 보고 싶어진다. 그리운 정자 언니, 드라마가 끝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나오면 좋겠고 도앵 선배 분량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기회를 잘 살려낼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능력이고 우연히 찾아온 소중한 기회를 근성 있게 잘 살려내는 것도 능력이다. 대충 차린 밥상을 시청자는 받고 싶지 않다. 영양을 고려해서 정성껏 메뉴를 짜고 멋지게 솜씨 좋게 차려낸 밥상, 손님을 초대했으면 그 정도는 차려 내놓기를.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사진=tvN,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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