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다치진 않는다구. 룩은 중요하니까.”
-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하이힐 때문에 넘어질 뻔했을 때 김래원이 괜찮냐고 하자 수애가 한 말.

[엔터미디어=나지언의 어떻게 그런 말을] 고모에게 빌린 전세금을 마침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다 갚은 서연(수애)은 이제 피자 라지 사이즈를 주문해 먹을 수 있게 됐다. 아직 거기에 미트볼 스파게티와 버팔로 윙까지 시켜 먹을 수 있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행복한 표정이다. 게다가 1주일에 한번 삼겹살을 왕창 먹을 수도 있고 참치회도 먹을 수 있다.

부모 없이 자라서 고모에게 빌린 전세금 빚을 이제 겨우 갚은 이 가난한 서연이 끌로에 백을 들고 다닌다고 네티즌들의 지적을 받았다. 클로에 백의 획득 경로를 모르는 네티즌들로서는 극을 보는 내내 답답하고 괴로울 수 있다. 드라마 내내 “저 비싼 백은 도대체 어디서 났지?”라고 머리를 쥐어 뜯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클로에 백의 획득 경로에 대해서라면, 몇 가지 추측 가능한 가설을 알고 있다.

1. 기억을 잃고 자기가 부잣집 딸인 줄 알고 명품 가방을 샀을 수 있다. 머리에 헤어롤 만 채로 집 밖을 나설 정도로 기억력이 감퇴되고 있는 서연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카드값을 보고 놀랐을 때는 이미 가방이 더러워진 후여서 그냥 어쩔 수 없이 갖고 다니는 거다.

2. 지형(김래원)이 선물했을 거다. 그렇게 부자인데 몰래 만나는 서연에게 미안해서라도 명품 가방 하나 선물 안 했을 리 없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3. 가짜일 거다. 우리나라만큼 가짜 명품 가방 구하는 게 쉬운 곳이 또 어디 있나? 30대 직장 여성 서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4. 뼈빠지게 돈 모아서 그간 빚 갚느라 고생한 자신을 위한 선물로 샀을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물론 동생에게는 비밀이다. 동생이 들으면 그나마 덜 서운한 가설로는, ‘중고 나라’ 사이트에서 헐값에 샀다는 얘기가 있다.

5. 사촌 오빠 재민(이상우)이 선물했다. 서연을 너무 아껴서 시청자들에게 사랑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사촌 오빠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사실 김수현 작가는 이미 서연의 캐릭터에 대한 단서를 우리에게 준 바 있다. 서연은 룩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지형에게 잘 보이려고 호텔에 속이 살짝 살짝 보이는 블라우스를 입고 간 여자며 지형이 다친다고 신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 했는데도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은 여자다.

그 힐 때문에 넘어질 뻔했을 때 못마땅한 얼굴로 지형이 쳐다보자 이렇게 말했던 것 기억 안나나? “넘어져도 다치진 않는다구. 룩은 중요하니까.” 호텔 앞에서, 결혼 날짜 잡았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힐 때문에 넘어질 뻔해서 민망해 죽겠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여자가 돈 없다고 천 소재 가방 들고 다니겠나? 부잣집 아들 지형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또박또박 따지는 서연은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절대 운동화에 티셔츠 입고 데이트 나갈 일 없는 여자다.

가방 획득 경로까지 다 보여줄 수 없는 연출자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가방 문제가 해결된 찰나,우리를 괴롭히는 건 출연자들의 단어 선택이다. 서연의 사촌 언니 명희(문정희)는 앞치마 두르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서연에게 왜 ‘에이프런’ 두르고 왔다고 말하는 걸까? 나이도 어린 향기(정유미)는 웨딩 드레스 입어볼 때 왜 웨딩숍 직원에게 ‘늘리지 마세요’ 대신에 ‘늘구지 마세요’란 할머니나 쓰는 말을 쓰는 걸까?

이 재밌고 흥미진진한 드라마에 대한 감정 몰입이 방해될까 두려워 스스로 그 캐릭터들을 이해하기 위한 결론을 내렸다. 자, 말이 되는지 들어보라. 사촌 언니가 삼겹살 먹기 직전 미국 드라마를 봤을 수도 있다. 자기도 모르게 최근에 들은 말, TV에서 누가 한 말을 따라하게 될 때 있지 않나? 설득력 있는 다른 가설은, 똑똑한 서연 앞에서 잘난 척 하려고 괜히 영어를 썼다는 거다. 단순한 추측도 가능하다. 갑자기 ‘앞치마’라는 한국어가 생각이 안 났을 수 있다. 향기는 엄마(이미숙)가 쓰는 단어를 자신도 모르게 따라 썼을 수 있다. 기 센 엄마에게 끌려 다니는 딸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칼럼니스트 나지언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피처 디렉터> nahjiun@paran.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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