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실격인 인간이 어디 있겠나, 세상이 무례한 거지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산에요. 산에 갔다가 바다에 갔다가... 음 집에 갔죠.” 한밤중 아무도 없는 기차역에서 철길을 하릴없이 걸으며 마지막으로 타본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부정(전도연)이 그 때 “기차를 타고 어딜 갔냐?”고 묻자 강재(류준열)는 그렇게 말한다. 산에 갔다가 바다에 갔다가... 집에 갔다고.

“산에 갔다가 바다에 갔다가...” 라고 강재가 말하곤 잠시 뜸을 들일 때 부정은 살짝 긴장했다.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본 게 아버지 장례 치르고 화장한 날 엄마와 함께 그 곳에 왔을 때였다는 강재의 말 때문이다. 어딘가 쉽지 않았을 상황이었을 테니 그가 갔다는 산과 바다가 마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길처럼 느껴지진 않았을까 걱정해서다. 하지만 그러고는 “집에 갔다”는 강재의 말에 안심한다.

부정이 강재의 말을 들으며 걱정하고 안도하는 건,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도 죽은 정우(나현우)의 사연이 있는 그 작은 기차역이 있는 마을 저수지를 찾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절망적이었을 것이고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을 게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이 주는 허함과 절망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같은 감정을 가졌지만 그 때 저수지를 찾았던 걸 지금은 후회한다고 했다. 강재가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부정이 똑같은 안도감을 느낀 이유다.

JTBC 토일드라마 <인간실격>이 그린 어느 저수지와 작은 기차역이 있는 마을에서 강재와 부정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천문대에 오르고 어쩌다 한 텐트 안에서 같이 밤을 지새게 되는 에피소드는 이 드라마가 담아내려는 위로의 메시지를 잘 보여준다. 아픈 아들을 위해 호스트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비싼 병원비를 충당해오다 결국 아들이 저세상으로 떠나고 절망감에 저수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정우. 정우와 저수지는 그래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상실한 듯한 절망을 은유하는 인간과 공간으로 그려진다.

정우의 죽음은 아마도 부정과 정우가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터다. 정신없이 살아내기 위해 살았지만 알 수 없는 ‘허한 마음’. 정우는 ‘역할 대행’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래서 자신의 존재는 지워진 채 살아가고 있었고, 부정은 아란(박지영)의 책을 대필한 후 그와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출판사에서도 쫓겨났다.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숨을 쉬며 살아가곤 있지만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존재가 지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되곤 느끼게 되는 허한 마음.

그래서 부정과 강재는 그 정우가 풍덩 뛰어들었던 저수지를 통해 다시 만난다. 우연히 저수지 근처를 지나다 부정은 그 곳에 마음이 이끌렸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은 모습에 누군가 신고해 파출소에 가게 됐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자신을 데리고 가줄 보호자 한 명을 찾기 힘든 부정이었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강재에게 ‘보호자 역할 대행’을 요청했고, 놀랍게도 그 먼 길을 강재가 달려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절망의 공간에서 <인간실격>은 부정과 강재를 통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위로를 건넨다. 아무 것도 아닌 관계처럼 보였고, 마치 돈을 주면 역할을 대행하는 그런 관계처럼 보였던 두 사람은 서로가 겪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삶’의 의지를 다시금 끄집어낸다. 과거 아버지를 화장된 날 어머니와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가게 된 그 길을 이야기해준 강재는 부정에게 문득 이렇게 묻는다. “어디 집 말고 가보고 싶은데 있어요?” 모르겠다는 부정의 말에 강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산에 갔다가 바다 갔다가 그리고 집으로 갈까요?”

그 말은 절망하기도 하고 허한 마음을 갖기도 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산에도 가고 바다도 가지만 그럼에도 결국 집으로 간다는 위로가 섞인 제안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천문대를 향한다. 강재는 엄마와 함께 오르던 그 길을 부정과 함께 걸으며 그 때 엄마가 천문대에서 하늘 가득 채워진 별을 올려다보며 한참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 때 어린 강재는 왜 엄마가 울었는지 진짜 몰랐을 터다. 하지만 버스에 두고 온 크림빵과 우유가 아까워서 울었다고 둘러댔다는 엄마의 말을 부정에게 해주는 강재는 이제 어렴풋이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늘 가득 반짝 반짝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엄마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가녀린 존재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너무 거대한 세상 속에서 먼지처럼 보이지도 않을 인간들이 살아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먼지들이 마치 저 우주의 별들처럼 반짝인다. 그것이 너무 작고 소소하고 가녀려서 갖게 되는 아름다운 슬픔. 엄마는 그걸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정과 강재도 그 엄마가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같은 걸 느끼고 있었을 지도.

도대체 무엇이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존재들인 인간을 이토록 ‘자격 운운’하며 실격 처리하는 것일까. 어째서 돈과 지위와 성공의 기준으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저수지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것일까. <인간실격>은 그런 무례한 세상을 에둘러 일갈한다. 작디작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위대해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로’의 말과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

안타깝게도 <인간실격>은 시청률이 낮다. 그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지금의 드라마 시청이 지나치게 당장의 사이다 같은 자극적인 지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답답한 현실에 사이다 한 잔 같은 작품들이 의미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실격>처럼 묵직한 밥 같은 무게감을 가진 작품을 낮은 시청률로 섣불리 ‘실격’이라 부를 순 없을 게다. 최근 들어 이만큼 진지하게 가슴을 건드리는 드라마를 본 적이 없으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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