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평 많은 ‘정이’, SF 단막극으로 보면 생각 달라진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정이>는 한국 SF가 세계적으로도 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는 줬다. 하지만 <정이>에 대한 평이 그리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AI의 비인간화 문제를 다룬 SF 영화지만 기존에 이 소재를 다룬 작품들에 비해 새로운 지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점. 또 영화가 보여주는 액션의 짜릿함에 비해 이야기의 진행이 스펙터클하지는 않다는 아쉬움. 기존의 영화보다 짧은 러닝 타임에 이야기의 전개 역시 단편과 장편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걸쳐 있다는 것, 결국에는 신파로 마무리 되는 것 아니냐 등등.

아마도 <정이>는 OTT 공개가 아니었다면 크게 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중들은 시간을 투자해 극장에 갈 때 거대한 어드벤처,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체험과 생각의 변화를 기대한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두 시간 정도 새로운 세계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원하기 때문이다.

<정이>는 그런 점에서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지구의 기후변화를 피해 우주에 이주한 쉘터에 대한 설정은 다소 식상하다. 크로노이드가 전투 용병 정이 프로젝트를 전개해 가는 과정 역시 익숙하고 허점이 많다. 전설의 용병 윤정이(김현주)의 뇌를 이식해 만든 전투 A.I에 대해서도 더 깊게 고찰하고 더 흥미로운 존재로 만들 수도 있었다.

다만 <정이>를 단막극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면 <정이>에 대한 시각은 또 달라진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익숙한 설정에서 시작해 시청자를 빠르게 이야기에 몰입시킨다.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 새롭고 낯선 세계관을 전달하기보다 익숙한 전개 안에서 인물들의 갈등과 교감을 위주로 사건을 끌어간다. 이후 최후에 이르러 시청자가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면 일단은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이>는 SF적 요소를 본격적으로 차용한 단막극으로는 꽤 괜찮은 면이 있다. <정이>에서는 사후 A.I 용병 실험체가 된 엄마 정이(김현주)를 바라보며 연구하는 딸 윤서현(강수연)의 감정을 위주로 전개된다. 그렇기에 사실 <정이>는 SF의 겉모습을 지녔을 뿐, 딸과 엄마가 A.I를 통해 서로 하지 못한 말을 나누는 평범하지만 울림 있는 드라마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정이>는 계속해서 A.I 정이의 고통을 보여주며 윤서현이 단순 연구자에서 엄마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애쓰는 딸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윤서현은 크로노이드가 정이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성 산업 프로젝트로 정이를 이용하려는 사실을 알자 정이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정이의 뇌를 통해 엄마 윤정이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정이>는 후반부의 화려한 격투 장면만이 아니라 윤서현이 정이와 감정적으로 교감하는 구조에 공을 들였다. 특히 윤서현이 정이 두뇌의 모성애 부분을 99% 삭제했음에도 정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딸 윤서현을 엄마처럼 안아주고 어루만져 준다. 이 장면이 주는 울림은 드라마로서는 충분히 성공적인 셈이다.

물론 드라마로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 엄마와 딸의 서사 외에 사후 뇌의 사용이나 A.I 비인간화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이 조금은 더 들어갔다면 <정이>는 더 여운이 짙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이>는 평범한 드라마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싶은 철학적 콘텐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강수연, 김현주, 류경수 배우들 각각의 연기 톤이 1980년대, 2천년대 초반, 지금 현재의 스타일을 보여주기 때문에 앙상블은 아쉬운 느낌도 든다. <정이>라는 작품 안에서 전체적인 연기 톤을 조율하는 과정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영화 ‘정이’스틸컷,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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