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비정한 현실과 대비되는 이연희·홍종현의 우정 혹은 사랑

[엔터미디어=정덕현] “윤조야 우린 들러리다. 이번 PT 이미 결정돼 있대. 얼스컴으로.”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레이스>에서 PR조아 대표 김희영(백지원)은 이제 PT에 나갈 준비를 하는 윤조(이연희)를 불러 그렇게 말했다. 대기업 세용에서 하는 경쟁PT. 하지만 ‘경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미 내정된 업체가 있고 그래서 다른 회사들은 들러리를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도 슈퍼갑인 대기업과의 관계를 위해서 PT는 해야 한다는 것.

굳이 내정된 회사가 있으면서 PR조아를 들러리로 세운 건, 송선태(조한철) 홍보2팀 팀장이 대놓고 김희영을 물 먹이기 위함이다. 송선태는 PT를 윤조가 하려하자 다른 회사처럼 대표가 나서서 하라고 명령했고, 심지어 PT 제품을 써보기는 했느냐는 식의 지적과 PT를 하며 화장도 안하고 나왔다는 성차별적 발언까지 했다. 이에 윤조는 참지 않고 그 문제의 발언을 꼬집는다. “앞에 PT를 참여하신 대행사들의 대표님들도 다 화장을 했던가요? 다 남성분이셨죠? 아, 남성은 안 해도 되나요? 프로페셔널 하다면 평소와 상관없이 코스메틱 PT를 발표하는 이 자리에 하고 와야 하지 않았을까요?”

<레이스>는 대기업의 대행사들을 상대로 일상화되어 있는 갑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결국 이 경쟁PT는 이미 내정된 대로 얼스컴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세용은 또 얼스컴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PT 내용은 윤조가 만든 안이 좋았다며 얼스컴에게 그걸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그 말은 얼스컴 보고 알아서 PR조아와 이야기해 그 아이디어를 빼와 일을 진행하라는 말이다. 얼스컴의 젊은 대표 서동호(정윤호)는 난감해진다. 그와 김희영은 과거 직장 선후배 관계로 가까운 사이. 세용의 이런 요구가 있었다며 서동호가 김희영에게 말하자, 김희영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듯 그리 동요하지도 않는다.

세용이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시도한 이른바 ‘스펙아웃’ 공개채용에서도 대기업의 스펙에 대한 불공정한 시선들이 그려진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치러진 채용에서 실력으로 뽑힌 윤조는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세용의 이미지를 위한 쇼였다는 걸 알게 된다. 뽑아 놓고 서로 받지 않겠다면 팀장들끼리 다투고, 업무도 주지 않고 이렇게 뽑힌 인물로서 언론 인터뷰만 줄줄이 하게 만든다.

하지만 스펙에 대한 이중잣대는 세용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스펙이 아니라 실력으로 뽑혀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스펙아웃 채용이 사실상 쇼였고 내정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소문이 돌면서 직원들은 동요한다. 윤조를 대놓고 스펙도 실력도 없는 합격자로 몰아세우며 ‘불공정한 현실’을 토로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들이 스펙을 쌓아 어렵게 들어온 회사를 윤조가 쉽게 들어왔다고 그의 스펙만을 보고 판단해서 하는 이야기들이다.

<레이스>는 제목에 담겨 있는 것처럼 직장 생활에서 저마다 하고 있는 ‘경쟁’을 다룬다. 그런데 그 경쟁은 윤조가 처한 것처럼 스펙이 없으면 실력만으로는 안되는 불공정함이 존재한다. 그건 윤조가 처한 스펙만의 문제가 아니다. 윤조가 있던 PR조사 사장 김희영처럼 대기업에서 일하다 나온 사람이 박힌 ‘미운 털’로도 갑질을 당하는 대상이 되고, PT를 따내고도 타 회사의 기획안대로 해달라는 대기업의 횡포 앞에 무력한 대행사에서도 이러한 불공정한 현실들이 그려진다.

<레이스>는 이 리얼한 우리네 일터의 현실들을 가져와 그 불합리함에 힘겨워하고 그러면서도 이를 깨치려 노력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직장 안에서는 동료, 선후배로서 치열하게 맞붙지만, 퇴근 후 모이는 술집에서 친구로(어쩌면 연인으로) 돌아가 그날 있었던 일들을 토로하고 풀어내는 윤조와 재민(홍종현)의 모습은 그래서 이 불공정한 사회를 그 자체로 꼬집는 느낌을 준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이들의 모든 일터의 껍데기를 벗어놓고 나누는 대화들이, 이들이 하루 종일 싸워온 저 스펙 사회의 일들을 하나의 병정놀이 같은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라고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은 이 치열하고 때론 더러운 불공정한 현실 앞에서 저마다의 어떤 ‘레이스’를 펼쳐나갈까. 실제 현실을 보는 듯한 리얼하고 디테일한 이야기들 속에서 모쪼록 청춘들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기를.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디즈니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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