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프티, 영미권에서 음악 자체로 통할 수 있다는 건

[엔터미디어=최영균의 듣보잡(‘듣’고 ‘보’고 ‘잡’담하기)]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가 K팝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4인조 피프티 피프티는 지난해 11월 데뷔해 아직 채 1년이 되지 않은 신인. 지난 2월 발표한 첫 싱글 <큐피드>(Cupid)가 4월 들어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과 영국 오피셜 차트에 진입 후 상승을 거듭해 각각 20위권과 10위권에 진입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이는 걸그룹 중 최고 성적이며 K팝 전체를 통틀어도 갓 데뷔한 신인이, 차트에 이처럼 오래 머물면서 미영 싱글 차트 최상위권에 진입하는 경우는 없었다. 소속사 어트랙트가 중소기획사라는 점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빌보드 등 글로벌 차트는 K팝에 있어 자금력과 인적자원이 풍부하게 갖춰진 대형 기획사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큐피드>가 도달한 순위의 대단함을 넘어 K팝 새 시대를 바라보게까지 만드는 것은 이 곡의 차트인 롱런 흐름 때문이다. 지난 4월 시작된 ‘큐피드’의 ‘핫100’내 항해는 두 달을 거쳐왔고 지금까지 추세상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빌보드 순위 선정 방식 중 라디오 에어플레이에서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K팝 곡들은 ‘핫100’ 차트 진입도 어렵지만 드물게 성공해 내는 경우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발표 직후 고점을 찍은 다음 바로 광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순위의 산정 요소 중 다운로드나 스트리밍 등 세일즈와 관련된 지표들에 비해 라디오 에어플레이 점수가 낮아서 그런 것으로 파악됐다.

에어플레이 점수는 현지 대중들의 고른 관심을 반영하는 지표이다. K팝 가수들이 팬덤 위주의 활동 방식으로 서구 대중음악계를 공략해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언어의 장벽을 넘어 대단한 성공 사례를 이룩해냈지만 일반 대중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큐피드’는 5월 둘째주 라디오 에어플레이 차트에서도 37위에 오르는 등 기존의 K팝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케이팝은 ‘듣는 음악’ 보다 ‘보는 음악’ 성격이 강했다. 감상용 음악이 아니라, 퍼포먼스 기반에 노래와 여러 비주얼 요소들을 얹은 종합 예술에 가까워서 귀로만 접근하고 평가하는 에어플레이 부문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BTS나 블랙핑크 등 K팝 최상위 스타들의 음악은 종합 예술적인 성격의 기존 K팝이면서도 감상용으로도 뛰어난 작품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K팝은 퍼포먼스를 전제로 팝, 록, 힙합의 여러 강렬한 사운드 요소들을 믹스한 형태의 음악이라 서구 대중음악 소비자들이 전적으로 감상용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던 상황이었다.

보컬들이 음악적 화학작용을 일으킬 만한 개성이나 실력보다는 팬들만이 구분 가능한 보컬들의 한소절 부르기 모음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서구 음악 시장을 뚫어낸 지금까지의 전략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했지만 서구 대중음악계의 다수를 차지하는 감상형 음악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숙제가 K팝에는 남아 있었다.

K팝은 피프티 피프티에 이르러 기존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인 글로벌 음악으로 지평을 넓힐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 피프티 피프티는 음악 자체로 서구 음악팬들에게 사랑 받는 K팝의 첫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피프티 피프티의 곡들에는 기존 K팝 곡들의 특징인 자극적인 사운드 믹스, 보컬의 기계음 튜닝과 보컬 파트의 인위적 배분이 없다. 멤버 각각의 개성적인 음색이 있고 이들간의 앙상블이 더해져 음악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곡에서 보컬 배치는 오직 곡의 완성도를 극대화하는데 맞춰져 있다.

감상용 음악의 세련된 정점을 이뤘던 시티팝의 K팝적인 해석과 도입이 보인다. 곡의 전개도 올드팝부터 오랫동안 공식처럼 리스너들에게 전달됐던 고전적이고 근본적인 경우가 많아 감상의 몰입을 돕는다.

기존의 K팝을 생각하면 혁신적인 이런 피프티 피프티의 음악은 제작자인 전홍준 어트랙트 대표의 제작자 역량과 열린 마인드에 기인한 듯하다. 전 대표는 최근에는 핫샷 등 아이돌 음악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바비킴, 심수봉 등 뚜렷한 음악적 개성과 재능을 가진 감상형 아티스트와 일을 많이 해왔다.

바비킴의 경우 스스로 래퍼라고 여기며 노래할 생각은 하지도 못할 때 음색과 필의 독창적인 가치를 발견해 설득 끝에 보컬로 활동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데뷔 음반 작업 때는 오랜 교포 생활로 너무 팝스러운 경향이 강했던 바비킴의 작업물들에 한국 대중가요의 여러 장르들을 혼합해냈는데 이 음반은 동서양 음악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피프티 피프티는 K팝이 감상용 음악을 선호하는 서구 대중들까지 포괄하는 진정한 글로벌 음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듯하다. 물론 피프티 피프티도 댄스 퍼포먼스가 있고 멤버 구성에 아이돌적인 요소도 있는 등 기존 K팝적인 면모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K팝이 감상용 음악 영역으로 지평을 넓혀가려면 노래만 하는 전문 보컬그룹을 내세우는 급진적 변화를 시도하기보다, 기존 케이팝 요소와 감상용 음악 활동이 결합된 피프티 피프티 같은 형태가 효과적일 것으로 여겨진다.

피프티 피프티가 <큐피드> 이후 활동에서도 계속 서구 팬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언젠가는 기타 한 대로 노래하는 포크 가수 같은, 한국 감상용 음악 중 글로벌 진출에 난이도가 높아 보이는 아티스트들까지도 K팝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피프티 피프티는 그래미 본상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도 갖게 한다. 사실 미국 음악계 최고 권위의 그래미 시상식은 K팝에게 각박하다. 서구 팝스타들과 흥행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K팝 스타들이 다수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에만 일부 수상자가 있을 뿐 아직까지 K팝에는 상을 준 적이 없다.

그래미는 본상과 장르 부문으로 나뉘는데 장르 부문에 BTS가 3년 연속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은 불발됐다. 이는 글로벌 음악의 새로운 물결인 K팝을 받아들이기에 그래미의 시각이 보수적인 탓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피프티 피프티는 본상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최고의 신인 중 신인상의 후보가 될 자격을 갖췄다. 본상은 K팝이 후보에도 오른 적이 없기에 후보 지명만 받아도 한국 대중음악에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일이다.

후보와 수상자 결정은 전미 레코딩 예술 과학 아카데미(이하 레코딩 아카데미)의 심사를 거친다. 보수적인 레코딩 아카데미로서는 기세와 영향력상 계속 외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진 K팝을 끌어안는데 음악 자체에 무게중심을 둔 ‘보수적 K팝’인 피프티 피프티가 물꼬를 트는데 가장 적합한 대상일 수 있다.

피프티 피프티가 신인상 후보에 오르려면 음악적으로 작품성을 레코딩 아카데미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미는 올해 초 주목할 만한 K팝 신인 걸그룹 10개 팀에 피프티 피프티를 올리면서 완성도 높은 노래를 한다는 선정 이유를 밝힌 바 있으니 기대해 볼 일이다.

나아가 내년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후보 실현 이상의 결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 K팝이나 한국의 콘텐츠들은 미국과 유럽 등 대중문화 본진으로 여기던 곳에서 절대 불가했던 일들을 도장깨기하고 있는 기적의 도전자들 아닌가.

최영균 칼럼니스트 busylumpen@gmail.com

[사진=어트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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