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언니’ 박세리부터 남현희까지, 캐스팅 효과 극대화하려면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요즘 화제가 되는 예능이 한 편 있다. E채널 <노는 언니>는 여성 출연자들만 등장하는 것도 모자라 박세리를 제외하곤 예능 방송 출연자체가 낯선 여자 운동선수들로 꾸려진 리얼 버라이어티다. 다같이 MT를 가고, 운동회를 개최하는 식의 무정형 리얼버라이어티라는 설정은 지극히 평이하나, 캐스팅 자체가 트렌드에 부합하는 것을 넘어 파격에 가깝다.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박세리가 맏언니이자 메인MC롤을 수행하고 펜싱의 남현희, 피겨 곽민정, 수영 정유인 여자 프로배구 톱스타인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가 출연한다(그러나 3회 예고편을 보듯 시즌이 곧 개막되는 관계로 현역 프로선수인 이 둘은 합류가 어려울 듯하다). 박세리를 제외하면 예능 시청자들에겐 모두 신선한 얼굴이다. 물론, 팬 친화적인 리그를 지향하는 여자배구 내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이재영, 이다영 자매는 유튜브를 비롯해 경기장 안팎에서 많은 매력을 뽐내긴 했지만 방송 예능이란 틀 안에서 자신들을 드러내 보이기는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 각 종목을 대표하는 여자 선수들이 경기장과 훈련장을 벗어나 생애 최초의 MT를 가서 나름의 일탈을 펼친다는 익숙한 설정임에도 1회 방영 후 이슈가 됐다. 오로지 여자 운동선수들만 출연하는 전인미답의 예능이기 때문이다. 예능선수 발굴의 대표적인 팜이기도 한 남성 스포츠 스타와 달리 여성 스포츠 스타는 방송인으로 정착한 경우가 없었다. 박세리가 말했듯 여자 운동선수로만 구성된 게 특별했고 취지도 좋았을 뿐 아니라, 요즘 선수들의 미모, 매력, 털털한 성격, 방송친화적인 끼, 확실한 캐릭터 등으로 인해 짤방이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얼굴에 열광하고 여성 예능인이 약진하는 요즘 분위기에도 부합한다. 방현영 CP가 제작발표회에서 말했듯 신선한 인물을 찾는 과정에서 기존에 없었던 구성을 찾게 됐고 또 여자끼리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대중들의 니즈가 반영됐다.

<노는 언니>가 매력적인 것은 단순히 여성 예능이어서가 아니다. 진짜 매력은 여자니까 가능한 이야깃거리와 함께 평생 치열한 삶을 살아왔고, 또 불합리한 현실에 맞섰던 여자 운동선수들이기에 가능한 유대와 공감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이다영 선수가 정유인 선수에게 스포츠 브라를 빌리는 에피소드도 그렇고, 식사 자리에서 피겨선수들의 짧은 선수 생명에 대한 이야기, 결혼하면 프로 팀 계약이 어려운 여자 수영의 현실, 인생의 청춘기에 필연적으로 은퇴를 해야 하는 스포츠 선수들의 생리, 뒷바라지한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사랑 등등에서 나타나는 공감과 유대가 출연진 내부의 리얼한 관계 형성의 바탕이 되고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정서적 교두보가 된다.

그런데 여성 선수들을 모아 새로운 캐릭터와 관계망에 집중하는 것은 좋았지만 무정형의 열린 포맷의 단점이 2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캐릭터쇼가 자리 잡기까지 스토리라인을 끌고 갈 코어 콘텐츠의 부재다. <노는 언니>1회 방송 이후 화제가 된 것은 박세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여자 선수들로도 캐릭터쇼가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호감도 높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1회의 신선함은 잠시뿐 2회에 익숙함을 넘어선 진부함으로 점철된다. MBC <끼리끼리>를 비롯한 신행 리얼버라이어티가 맥을 못 추고 사라지는 이유고, 스포츠스타들을 대거 출연시키지만 조기축구라는 확실한 콘셉트와 목표를 가진 JTBC <뭉쳐야 찬다>와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이다.

몸개그와 승부욕을 보여준 몸풀기 족구게임이 다소 길어진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게스트를 투입하는 예능적 장치를 더하면서 프로그램은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유세윤, 장성규, 황광희는 분명 게스트지만 역할은 메인MC. 이들이 중앙에 서서 토크쇼와 게임을 진행하면서 출연자들의 매력을 정형해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때부터 자연스러운 관계나 함께 만들어가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올림픽 시즌 후 여자 선수들을 게스트로 초대한 여느 예능과 같아진다.

그러면서 새로움, 예상 밖의 호흡이나 재미는 급격히 줄어든다. 여성 예능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연애, 이성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고, 인위적인 진행 방식으로 인해 고정 멤버가 게스트화되면서 캐릭터쇼는 멈췄다. 장성규의 진행 하에 일종의 레크리에이션 게임과 그 이후 이어진 캠프파이어에서 춤, 노래자랑, 눈물까지 다양한 끼와 인간적 면모를 볼 기회는 됐지만 관계망이 작동하지 않고 게스트화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유일하고도 강력한 무기인 파격적인 캐스팅이 가진 흥미로움이 증발했다. 아마도 제작진의 염려 혹은 익숙한 작법을 따르는 관성이 작용한 듯한데, 진행을 위한 여성 방송인도 두지 않았던 만큼 출연진들을 더 믿어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예능판에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격언이 있다. 최근 공격적인 편성을 펼치고 있는 E채널에서 모처럼 화제성을 가진 대형 콘텐츠를 만들었다. 문화적, 시대적 감수성도 담아냈고, 채널의 환경으로 인해 1회 시청률이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큰 이슈가 되며 폭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이 모든 건 여자 선수들을 모은 예능을 처음으로 시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굳이 뻔한 그림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모처럼 성장가능성이 풍부한 예능의 틀을 잡은 만큼 무정형의 포맷을 견지하기보다 캐릭터쇼를 살리기 위한 보다 세밀한 전략과 자신감이 필요해 보인다.

김교석 칼럼니스트 mcwivern@naver.com

[사진=E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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