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손끝으로도 노년의 꿈을 설득해 내는 박인환이라는 마법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남지우·이승한·정석희 세 명의 TV평론가가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TV삼분지계]를 통해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70대에 발레를 향한 열정에 불을 지핀 노인의 청춘과, 20대에 사는 게 너무 고단한 청년 발레리노의 외로움. HUN 작가 글, 지민 작가 작화의 원작 웹툰 <나빌레라>(2016-2017)는 서로에게 삶의 무게를 이겨낼 지혜와 꿈을 향해 약동할 용기를 주고받는 두 발레리노의 이야기를 다룬 세대 공감 웹툰으로 크게 사랑받은 바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tvN에서 공개된 드라마판 <나빌레라>는, 원작의 충실한 계승자로 보인다. 오랜 세월 일일드라마 속 ‘주인공의 아버지’ 정도의 역할로 소비되며 연기력에 비해 저평가된 감이 있는 박인환이 일흔에 처음 포인(point)을 시도하는 덕출 역할로, <좋아하면 울리는>과 <스위트홈>으로 차세대 주자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는 송강이 삶에 지쳐 자주 무릎이 꺾이는 청년 발레리노 채록 역할로 열연한다.

초반에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들의 눈을 사로잡은 건, 단연 덕출을 연기하는 박인환이다. 정석희 평론가는 3회까지만 방영되었는데 벌써 노트에 적어두고 싶은 대사들이 빼곡하다며 “2019년에 <눈이 부시게>가 있었다면 올해는 <나빌레라>다.”라는 극찬을 보냈고, 남지우 평론가 또한 “노인의 몸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고, 관객이 그것의 물성을 물컹하게 느끼는 순간, 우리는 유쾌를 느낀 적이 있던가.”라고 자문하며 ‘백기투항’을 선언했다. 이승한 평론가 역시 <나빌레라>가 원작의 장점은 크게 계승하고 단점은 줄여 물려받았다면서, 그림으로 구현된 원작의 역동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신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박인환의 발레를 열망하는 눈빛과, 주춤주춤 밸런스를 잡기 위해 도약하는 순간의 육체”가 그 어떤 스펙터클보다 더 강렬하다고 평했다.

◆ 담아두고 싶은 대사가 빼곡한 인생
한 학자는 TV를 ‘정보 사이의 여백이 많아서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쿨미디어’로 정의했다. 또 다른 학자는 TV가 ‘영상과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수동적 매체’라는 반론을 펼쳤다. TV가 시청자가 나서서 채우는 쿨미디어인지 아니면 오히려 시청자가 세뇌당하는 백해무익한 과학기술인지, 무엇이 답일까? 학자가 아닌 시청자 입장인 내가 생각하는 좋은 프로그램, 좋은 드라마는 지극히 단순하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듯이 메모해둘 장면과 대사가 많으면 좋은 프로그램, 좋은 드라마다.

tvN <나빌레라>는 3회가 방송된 현재 노트 세 페이지가 빼곡하다. 담아두고 싶은, 놓치고 싶지 않은 대사가 넘쳐난다. 칠순을 맞은 나이 지긋한 남자 어르신 말씀에 이처럼 귀 기울인 적이 있었나? 세대 간은 물론 남녀 간의 소통 단절의 벽을 허무는 어르신이 나타났다. 덕출 씨(박인환), 여러모로 참 반갑다.
채록 역의 송강을 보려고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가 덕출 역의 박인환 씨에게 반했다는 분들이 많다. 스물세 살 나이 어린 채록이 점점 덕출 씨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도, 시청자들이 배우 박인환 씨에게 마음을 주게 되는 것도 다 내공 때문이다. 삶의 무게로 다져진, 어느 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은 연륜에 의한 내공. 노년의 남자 어르신이 온전히 주인공인 드라마가 일찍이 존재했던가? 어르신과 청년의 브로맨스는? 본 기억이 없다. 불륜, 출생의 비밀, 불치병이 없어도, 소리치고 화내고 통곡을 하지 않아도 이 드라마는 가슴 아프고 슬프고 또 한쪽으로는 싱긋이 미소가 지어진다. 2019년에 JTBC <눈이 부시게>가 있었다면 올해는 <나빌레라>다.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할아버지의 몸을 느끼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도 무용수의 꿈을 이루려는 스물셋 채록(송강), 대기업 인턴십에 어렵사리 합격해 갖은 부조리에도 정규직이 되려는 은호(홍승희), 교사에 의한 학원 폭력이라는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호범(김권)까지. tvN <나빌레라>를 보면서 내 또래 인물들에 조금 더 집중해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했다. 입사 첫날부터 기존 ‘알바생’들을 뛰어넘는 대우를 받는 ‘대졸 인턴’들. 하지만 그들 역시 상사의 개인 번역 과제를 떠맡고 진상 손님의 삿대질을 받아내는 등 녹록지 못한 상황을 겪는다. 혹독한 취업난에서 직업 세계로의 진출 자체가 너무도 힘든 것을 아는 내게, <나빌레라>가 그리고 있는 20대 청년들의 현실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그런데도 내 정신은 채록이나 은호가 아닌 온통 덕출 할아버지에게 빼앗겨 버렸다. 배우 박인환의 연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나서 그런 걸까? 20대 라이터라는 묘한 책임감 때문인지 웬만해선 또래 배우들을 쫓으려 했지만, 3회차가 지난 지금, 나는 덕출 앞에 백기투항, 무장해제다. <나빌레라>는 발레라는 소재로 노인의 몸과 그것의 물성을 있는 힘껏 노출시킨다. 영화 <은교>(2012)에서 늙은 소설가 박해일은 청년의 몸에 비해 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몸을 혐오했고,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박카스 할머니’ 윤여정은 자신의 늙어버린을 몸을 성적으로 이용하여 그저 생존하고자 애쓴 바 있다. 노인의 몸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고, 관객이 그것의 물성을 물컹하게 느끼는 순간, 우리는 유쾌를 느낀 적이 있던가. 나는 덕출의 몸으로부터 그 유쾌함을 최초로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덕출의 발레 도전기는, 할아버지 개인의 일탈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됐다. 몸에 착 달라붙는 발레복의 깊은 네크라인, 자세를 고쳐잡으며 크게 내쉬는 숨소리 같은 것들이 덕출의 육체를 구성하고 그 깊은 물성을 완성시킨다. 이러한 디테일들을 육체의 연장으로 만들어, tv 너머 관객에게 몸의 물성을 전해오는 박인환의 연기에 존경을 표한다. 해남(나문희)과 같은 여성 인물들을 상황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닌, 그들 역시 꿈이 있는 존재로 사려 깊게 묘사한다면 <나빌레라>는 앞으로 더 좋은 드라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발꿈치가 가렵다. 날아오르고 싶어서 그렇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jeewoo1119@gmail.com

◆ 원작의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줄여 계승한 드라마
tvN <나빌레라>의 장점과 단점은 많은 부분 HUN x 지민 작가의 동명 원작 웹툰 <나빌레라>의 장단점과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생의 마지막 챕터에도 약동하는 도약의 꿈을 향해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덕출(박인환)과 그에게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채록(송강) 간의 케미스트리는 분명 원작에서 계승해 온 장점이다. 반면 덕출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 왔을 아내 해남(나문희)이 덕출의 도전을 민망해하고, 맏아들 성산(정해균)은 온몸으로 덕출의 발레를 향한 열정을 말리려 드는 식으로 묘사하며 노인의 삶 중 콕 집어 노인 ‘남성’의 삶만을 유독 안쓰러워하는 남성 중심적인 서사 또한 원작에서 이어져 온 단점이다.
보통 웹툰 원작의 드라마들은 원작의 장단점을 엇갈려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 장점은 온전히 계승하지 못하는 대신 단점이 더 커지는 식의 아쉬운 경험은 또 얼마나 많았나. 다행히도, 지금까지 공개된 분량만 보면 tvN <나빌레라>는 장점은 더 크게 살려서 받고 단점은 줄여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식구들의 안살림을 도우며 말 못 할 속앓이를 하는 해남의 서사가 원작에 비해 훨씬 더 전진배치 되었고, 그런 해남을 살아있는 전설 나문희의 연기로 설득하면서 <나빌레라>는 원작의 남성 중심적 시선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데 성공한다. 덕출이 명언을 반복하며 ‘인생의 지혜를 가득 담은 어르신’ 멘토 롤을 눈에 띄게 수행하는 장면이 원작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 또한 매체의 성격 차이를 감안한 개선이다.

단점이 보완된 자리를 가득 채운 건 극대화된 장점이다. <나빌레라>는 원작의 경쾌한 코믹 터치를 상당 부분 걷어내고, 주인공들이 겪는 삶의 역경을 더 충실하게 그려냄으로써 덕출과 채록이 도약하기 위해 얼마나 큰 생의 무게를 이겨내고 있는지를 묵묵히 설득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장점은 단연 박인환이다. 부분 부분 대역을 쓴 티가 나는 드라마가, 지민 작가의 역동적인 그림으로 구현된 원작의 발레씬을 따라가기 어려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박인환의 발레를 열망하는 눈빛과, 주춤주춤 밸런스를 잡기 위해 도약하는 순간의 육체는, 그 어떤 스펙터클보다도 더 강렬하고 묵직하다. 압도적이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영상=tvN.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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