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집’ 한국판, 호불호 갈린 가운데 주목할 차별점들

[엔터미디어=정덕현] 다른 건 하회탈뿐이다? 아니다 확실히 한국판이 더 볼만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1(이하 종이의 집)>에 대한 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뉜다. 유명한 원작을 가진 작품의 리메이크에는 항상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원작과의 비교 때문이다. 원작의 재미요소를 얼마나 잘 리메이크에 녹여냈는가와 더불어, 리메이크만의 확실한 차별점을 기대하게 되는 다소 깐깐한 관전 포인트 때문이다.

스페인 원작 <종이의 집>은 워낙 큰 인기를 끌어 시즌5까지 제작된 작품이다. 넷플릭스 구독자라면 당연히 필수적으로 봐야 하는 작품처럼 인식될 정도. 교수라 불리는 인물이 범죄자들을 모아 스페인 조폐국을 터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이 모든 범죄를 진두지휘하는 교수와, 협상을 이끌어가고 사건을 수사하는 경감의 치열한 두뇌 게임, 그리고 인질극 속에서도 벌어지는 다양한 관계의 서사들이 원작 <종이의 집>의 묘미다.

그런데 한국판에는 ‘공동경제구역’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아마도 이 지점은 이 리메이크가 가능했던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게다. 원작에는 없는 남북한 통일 설정이 들어 있어서다. 왜 리메이크가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에서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들어 있다. 북한이 개방을 선언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먼저 경제를 통일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를 찍어냈다는 게 이 한국판이 새롭게 가져온 설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러한 일종의 남북한 ‘공동경제구역’ 설정이 그저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작이 조폐국을 터는 교수 일당들과 이들과 협상 혹은 진압을 하려는 경찰들 그리고 조폐국에 인질로 잡힌 이들의 치열한 머리싸움과 복잡하게 얽히는 관계를 그렸다면, 한국판에는 이들 구성원들이 또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으로 뒤섞여 있다는 게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낸다.

즉 조폐국 안으로 들어간 일당들 중 누가 리더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인질들을 관리하는 방식이 달라지는데, 처음 리더를 맡게 된 베를린(박해수)이 북한 수용소에서 30년 넘게 지옥같은 수감생활을 하고 나온 사실은 그의 인질 관리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교수(유지태)는 이 일(?)에서 여론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건 여론에 의해 이들이 ‘죽여 마땅한 인물들’이라 여겨지면 경찰의 무력진압이 이뤄지고 그러면 교수가 생각하는 계획이 모두 틀어지기 때문이다.

교수는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고 화폐도 단일화했지만 그래서 생겨난 불평등과 양극화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불만을 갖고 있는 국민정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으로 가져오려 한다. 그래서 마치 이들이 조폐국을 터는 걸 ‘의적’처럼 느끼게 해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려 한다. 그래서 교수는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게 하려 애쓴다. 반면 교수의 이런 생각을 ‘이상’이라 말하며 현장은 다르다는 베를린은 효과적인 통제는 ‘공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남북한의 살아왔던 방식이 다르고, 그 안에서 생겨난 생각의 차이가 갈등을 만든다.

그런데 이런 갈등은 교수 일당 안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이들과 대응하는 경찰 측 협상전문가 선우진(김윤진)과 북한 특수요원 출신 협상가 차무혁(김성오)도 입장이 갈린다. 선우진이 협상과 인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차무혁은 무력진압을 통해서라도 빠른 해결을 원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으로 나뉜 갈등은 조폐국 안에 붙잡힌 인질 사이에서도 생겨난다. 남한 출신 조폐국 국장(박명훈)이 제 살길 찾기 위해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킨다면 북한 출신인 부국장은 이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인질들을 들어 국장의 그런 행동을 막으려 한다.

이처럼 통일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저 기계적인 결합일 뿐, 화학적으로는 섞이지 않은 남한과 북한의 정황들이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서로 부딪친다. 그 과정에는 그간 우리가 현실로 겪어온 남북한 사이의 대결구도들이나 서로 다른 통치 방식에 익숙해진 이들이 갖게 된 다른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6부작으로 만들어진 ‘파트1’을 다 보다보면 이들의 갈등이 서로 부딪치고 깨지면서 조금씩 서로 간에 화학적 결합을 이뤄가는 흥미로운 변화를 볼 수 있다. 이건 아마도 남북한이 갈라져 그 경계로 인해 결코 실질적인 통일이 요원하다고 여기는 현실에 대한 풍자적 표현일 게다. 즉 갈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결합하고 부딪치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해법들을 찾아갈 때 실질적인 화학적 결합으로서의 통일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이 작품이 말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남북한으로 갈라진 ‘경계’라는 키워드는 심지어 교수와 선우진이 서로 대결하고 협상하다 가까워지거나, 인질과 범죄자가 함께 지내는 과정에서 그 관계가 진전되는 식으로 확장된다. 즉 세상에 범죄자와 경찰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뉜 경계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 관계를 모두 말할 수는 없다는 걸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점이 <종이의 집> 한국판이 갖는 차별점이다. 물론 이러한 차별점을 얼마나 잘 연출적으로나 연기를 통해 완성도 높게 구현해 냈는가는 보는 이들에 따라 달리 보일 게다. 원작을 워낙 인상적으로 본 시청자라면 실망감을 느낄 수 있지만, 반면 원작에 정서적인 괴리를 느낀 시청자였다면 이 리메이크가 더 마음에 와 닿았을 수 있다.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종이의 집> 한국판이 단지 살바로르 달리 가면을 하회탈 가면으로 바꾼 정도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한국이어서 가능한 차별점이 존재하고 그 차별점이 이 작품을 리메이크로 만들게 된 핵심적인 요소라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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