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PD의 예능 실험,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지구마불 세계여행’)
‘지구마불 세계여행’, 날것 유튜브와 조미료 친 예능의 실험대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주사위를 굴려 나오는 대로 세계여행을 한다? <지구마불 세계여행>의 발상은 흥미롭다. 블루마블 게임을 하듯 세 명의 여행 크리에이터들이 지구 전체를 하나의 게임판처럼 활용해 주사위를 굴려 여행을 하고 이를 담은 영상의 조회수로 대결해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한 이에게 우주여행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 스타 여행 크리에이터들인 곽튜브, 빠니보틀 그리고 원지가 이 여행 대결에 뛰어들었다.
처음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다짜고짜 주사위를 굴려 각각 걸린 나라는 싱가포르(빠니보틀), 라오스(곽튜브), 방글라데시(원지)다. 생각만큼 여행에서 담을 게 별로 없다며 모두가 꺼려했던 싱가포르가 걸린 빠니보틀은 ‘10달러 챌린지’로 재미를 만들려 했다. 알아서 생고생을 자처하겠다는 것. 10달러 버티기를 하겠다 공언한 마당에 그가 뽑은 ‘시키는 대로 여행하기’ 황금열쇠 때문에 곽튜브와 원지가 시킨 ‘박물관 가기’, ‘크랩 먹기’ 미션까지 포함됐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웬만하면 걷는 고행을 보여줬다. 그다지 재미있다 보기 어려운 아이스크림 박물관을 체험하고,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게 요리를 먹었다.

하지만 이런 여행은 빠니보틀이 유튜브를 통해 보여줬던 여행과는 사뭇 결이 달랐다. 즉 어떤 미션 설정이 들어가 있어 자유로운 느낌이 덜 했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어도 어쨌든 영상을 만들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짜는 여행은 빠니보틀 특유의 자유로움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유튜브 여행 콘텐츠와 비교해 그다지 재미를 주지 못했다.
사정은 곽튜브나 원지도 마찬가지다. 곽튜브는 라오스에 도착했지만 재밌게 찍겠다는 욕심 때문에 루앙프라방까지 가는 길에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었고, 원지는 방글라데시까지 가는 과정 자체도 힘든 데다, 도착해서도 호텔 예약이 잘못되어 기대했던 호캉스(?) 대신 촬영팀과 함께 한 방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다음날 나선 방글라데시 여행에서도 우연히 만난 청년과 소통하면서 나름의 재미를 만들었지만 목적지로 가는 도중 경찰에게 붙잡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허탈한 경험을 하게 했다.

사실 유튜브에서 이러한 여행 중 벌어지는 좌충우돌은 그 자체가 재미를 줄 수 있었지만, <지구마불 세계여행>처럼 일종의 미션 게임이 부여된 여행은 그 강박 때문에 재미가 반감되는 결과가 생겼다. 특히 별다른 편집이나 자막 혹은 그 영상을 보며 후토크를 하는 식의 예능적인 재미가 부가되지 않은 유튜브 버전 영상들은 밋밋한 느낌마저 줬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똑같은 여행기 영상을 갖고 노홍철, 주우재, 주현영과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가 한 자리에 모여 뒷얘기를 나누는 식으로 익숙한 기성예능의 ‘조미료를 친’ ENA 버전 방송은 나름의 재미를 줬다는 사실이다. 평이하게 지나가는 영상도 그에 대한 리액션들이 달리니 다른 느낌과 재미가 더해졌다. 역시 방송 프로들의 역량이 돋보이는 기성예능의 익숙한 맛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유튜브 버전과 ENA 채널에서 하는 버전으로 이원화한 방식은 그래서 <지구마불 세계여행>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가진 실험적 성격을 보여줬다. 조금 예능적 맛은 심심하지만 날것의 생생함이 장점인 유튜브 버전과 기성예능의 익숙한 틀이지만 심심했던 여행기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ENA 버전을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실험적 성격은 이 프로젝트에 김태호 PD라는 프로 연출자와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라는 1인 크리에이터들의 만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고, 이들 1인 크리에이터들이 늘 해왔던 각자의 여행기에 블루마블 게임이라는 기성 예능 방식을 접목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즉 <지구마불 세계여행>은 다름 아닌 현재의 예능이 유튜브 같은 새로운 플랫폼에 의해 변화되어가고 있는 그 흐름을 이 이질적인 두 요소를 결합하고 그 방송을 이원화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실험은 말 그대로 실험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성공적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양자의 색깔이 시너지를 내기보다는 각각의 매력을 상쇄하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올라온 빠니보틀 유튜브에서 지인들과 함께 캠핑카를 빌려 호주를 여행하는 영상이 이 블루마블을 활용한 거대 프로젝트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실험이 보여주는 기성예능과 유튜브 예능의 분명한 차이점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든다. 유튜브의 날것이 좋은지 아니면 익숙한 맛이어도 조미료를 친 기성예능이 좋은지. 과연 시청자들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유튜브,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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