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간지러운 상찬 ‘펜트3’가 남긴 것, 그리고 남겨져야 하는 질문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결국 다 죽었다. 아니 다 죽였다.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3>는 모든 주요 인물들이 살해되거나 자살하거나 죽는 결과로 끝을 맺었다. 오윤희(유진)는 주단태(엄기준)와 천서진(김소연)의 공조(?)로 벼랑 끝에서 차량에 밀려 추락사했고, 주단태(엄기준)는 심수련(이지아)이 쏜 총에 머리를 관통당한 채 헤라팰리스 펜트하우스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하윤철(윤종훈)은 천서진(김소연)과의 격투 끝에 시력을 잃은 후 결국 그의 손에 떠밀려 아파트 난간에서 떨어져 사망했고, 심수련 역시 천서진에 의해 벼랑 끝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천서진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2박3일 특별 외출을 받고 나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로건리(박은석) 역시 골수암이 재발해 사망했다.

모든 주요인물들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엔딩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의 죽음이 드라마 내적 개연성에 의해 도달한 결과가 아니라 작가의 개연성을 무시한 자의적 선택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은 이런 파격조차 아무런 감흥을 남기지 않는다. ‘죽었다’가 아니라 ‘죽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줄초상. 이런 엔딩은 뭘 말해주는 걸까. 마치 작가가 마음대로 쌓았다가 이제 끝낼 때가 돼서 의미 없이 부서뜨린 모래성 같은 허망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모래성은 작가 혼자 마음대로 쌓고 무너뜨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를 들여다본 시청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면 말이다.

<펜트하우스3>가 그 종영에 즈음해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이 작품이 남긴 것들에 대해 4가지를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시청률이다. ‘시즌 총 48회에 48번의 1위’를 했다는 것. 이건 수치적으로 나온 결과니 반박불가의 사실이다. <펜트하우스>는 시청률에서 성공했다. 두 번째로 제시된 건 ‘명품 배우들의 압도적 열연’이다. 이 부분에서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시즌1 정도까지야 천서진 역할을 소름끼치게 연기해낸 김소연에 대한 상찬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지만, 그 후에는 도무지 연기자들이 연기할 수 있는 대본이 아니었다.

캐릭터가 어떤 감정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어 연기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대본 자체가 제공되지 않아서다. 물론 시즌1도 그런 면이 있었지만 시즌2부터 연기자들은 대놓고 본격적으로 과장연기를 했다. 자신의 연기를 실제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건 가짜라는 걸 대놓고 드러내는 연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압도적 열연’이라는 표현에 공감하기가 어렵다. 연기자라면(그것도 명품 배우라면) 사실 개연성 없는 캐릭터에 대해 작가나 감독에게 이의제기를 해야 되는 게 상식적이다.

세 번째로 이 작품이 남긴 것으로 제시된 건, ‘적재적소에서 활약 빛난 신예들’이다. 김현수, 진지희, 김영대, 한지현, 최예빈, 이태빈 같은 신인 연기자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연기 역시 저 명품 연기자들처럼 제대로 발휘됐다 보긴 어렵다. 연기자가 제 역량을 제대로 보이려면 역시 대본이 중요하다. 그 안에 충분히 공감 가는 캐릭터가 있어야 하고. <펜트하우스>에서 그런 인물을 찾는 일은 실로 어렵다. 이런 연기를 경험했다고 벌써부터 업계에서 도는 이 신예들의 엄청나게 치솟은 몸값 이야기는 그래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의 성과로 제시한 건 ‘인간의 극한 욕망이 불러온 끔찍한 최후’라는 메시지다. 모두가 죽었으니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메시지는 그렇게 제시한다고 전달되는 게 아니다. 작품이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일관된 스토리 속에서 그려내야 그걸 본 시청자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느낌으로는 <펜트하우스>에서 인간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초반에야 오윤희 같은 인물을 통한 ‘인간적 욕망’이 슬쩍 드러났지만 그 후로 극이 미친 듯이 흘러가면서 대부분 인물들은 극도로 과장된 괴물들이 됐다. 시즌3쯤 오면 그래서 상식적인 인간을 보기가 어려웠다.

‘채워질 수 없는 일그러진 욕망으로 집값 1번지, 교육 1번지에서 벌이는 서스펜스 복수극! 자식을 지키기 위해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의 연대와 복수를 그린 이야기!’ 애초 기획의도에는 부동산과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펜트하우스>는 죽고 죽이다 다 죽는 자극적인 이야기의 끝단으로 마무리 되었다. 헤라팰리스가 폭탄에 의해 통째로 무너지는 황당한 상황까지 그려졌지만, 이런 단순화는 부동산이나 교육에 대한 진짜 문제들을 통째로 가려버리는 결과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펜트하우스>가 남긴 건 시청률이다. 그런데 이런 개연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시청률을 얻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드라마 내적 개연성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며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가져가는 시청률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장면을 먼저 상정하고 거기에 꿰맞추기 위해 개연성을 망가뜨리기까지 하는 방식은 시청률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래서 ‘막장’이라는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극적인 표현과 수위를 써서 막장이 아니라, 자극을 위해 완성도를 만드는데 공을 들이지 않은 ‘막장’이다. 전자는 19금 수위를 등급으로 세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후자는 시청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용납이 어렵다. 물론 제작자와 방송사가 상업적인 이유로 이런 드라마를 만들고 방송할 수는 있다 쳐도, 스스로 높은 시청률을 마치 ‘상찬’의 의미로 자축하며 ‘작품성’, ‘완성도’, ‘연기력’ 운운하는 건 너무 낯간지러운 일이다. 이걸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펜트하우스>의 종영이 남긴 건 악역향과 박탈감이고, 남겨야 하는 건 그래서 이제 과연 시청률이 나온다는 이유로 시청자들과의 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연성마저 깨는 드라마를 앞으로도 용인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막장이라는 표현이 너무 상투적일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현실이라 ‘안 볼 사람은 보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이런 작품들이 시청률 잣대로 성공을 자축하면서 만들어지는 드라마업계 전반의 악역향과 상대적 박탈감을 떠올린다면 그러려니 지나칠 수가 없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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