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수백 마디 말보다 더 우리를 설득시키는 건

[엔터미디어=정덕현] “내가 이중인격이면 넌 다중인격이야. 싫은데 좋은 척 수십 년을. 그래. 이해는 간다. 넌 의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애니까. 넌 끝까지 의리 있는 년. 멋진 인간 소리를 듣고 싶은 거겠지? 그런데 널 세상에서 가장 오래보고 제일 잘 아는 이 친구가 말해준다. 너 그닥 의리 있는 년 아니야.”
제주에서 공주 대접을 받는 미란(엄정화)과 무수리 취급을 받아온 그의 둘도 없던 절친 은희(이정은)의 갈등은 우연히 은희의 일기장을 통해 그 진심을 보게 된 순간부터 파국으로 치달았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가장 만만한 사람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미란이 은희는 못내 싫었지만, 학창시절부터 자신을 챙겨줬던 미란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는 은희는 끝내 그 마음을 숨기고 있던 터였다.

tvN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담은 은희와 미란의 이야기는 공주와 무수리로 불리며 시작되던 이야기에서부터 그 갈등이 예고됐고 그리고 예정대로 미란의 절교 선언이 이어졌다. “그냥 나 버려. 못 버려? 의리 빼면 시체인 정은이라? 그럼 내가 버려줄게.”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결국 이 두 사람의 화해 또한 어느 정도는 예고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여러 관계들이 에피소드별로 등장해 갖가지 갈등들을 꺼내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화해점을 찾아간다는 것이 그 이야기구조이기 때문이다.
‘오해-갈등-파국-화해’라는 어찌 보면 뻔한 스토리구조이지만, 중요한 건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내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미란과 은희가 화해하는 대목은, 이 드라마가 가진 화해 방식이 어떤 특별한 차별점을 갖고 있는가를 잘 드러낸 장면이다. <우리들의 블루스>가 어디서 본 듯한 스토리구조를 가져오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건 화해의 순간에 등장하는 무게감이다. 그저 말로 소통해 풀어지는 화해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묻어나면서 전해지는 화해라 다를 수밖에 없는 무게감.

마사지샵을 해온 미란과 손님으로 찾아온 은희가 나누는 화해의 풍경은 미란의 손끝으로 느껴지는 은희의 딱딱하게 굳어있는 어깨와, 은희의 몸에 느끼는 미란의 야무진 손길로 표현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물론 말로는 꼬인 오해를 풀어내고 있지만, 그런 말이 전할 수 없는 서로에 대한 진심은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오며 생긴 은희의 굳은 어깨와 역시 누군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결코 공주의 삶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미란의 손끝이 전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무수리 취급 받아온 은희가 다름 아닌 공주 대우 받아왔던 미란에게 마사지를 받는 광경이다. “야 몸이 돌이야. 이러다 중풍 맞아요. 뇌질환 오시고. 오늘 시간 어떠세요? 바로 제주 가시나요? 그럼 시간도 많으신 데 마사지는 풀코스로. 손님 몸이 너무 굳으셔서 이대론 내가 그냥 가신다고 해도 못 보내겠네...” 친구에서 직원의 목소리로 바뀌어 은희를 마사지해주는 미란에게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참 매일 신간 편히 카운터만 보는 줄 알았신디...”

<우리들의 블루스>는 하루하루 힘겹게 노동하는 이들이 겪는 어떤 갈등들을 가져와 아마도 그 노동이 만들어냈을 그들 특유의 생명력으로 그걸 풀어내는 과정을 담아간다. 우울증을 앓는 선아(신민아)가 밝은 날도 어둡게 조명이 꺼져버리는 우울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을 때 그에게 손을 내밀어 끄집어내주는 건 다름 아닌 동석(이병헌)이 녹음해 보내준 “윗도리 아랫도리-” 같은 물품 목록을 불러주는 목소리다. 그런 노동의 목소리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선아를 일상으로 다시 끌어올려주는 것.
골프 유학 간 딸 때문에 은희에게 접근해 첫사랑 운운하며 돈을 빌리려 한 한수(차승원)가 그 집착을 벗어내고 제 삶을 되찾게 한 것도 억척스럽게 살아온 은희의 생명력과 우정 때문이었다. 이제 펼쳐질 영옥(한지민)과 정준(김우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쌍둥이 언니 영희(백지윤)에게서 도망치듯 제주까지 들어왔지만 언니를 부양하기 위해 물질에 욕심까지 부리는 영옥에게 손을 내미는 건 다름 아닌 제주의 해녀들과 정준 같은 선장이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동생을 찾아 제주까지 오게 된 영희 앞에서 그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에 잠깐 정준도 또 해녀들도 놀라지만 이들은 금세 영희를 받아들인다. 사랑한다 했던 남자들이 영희의 존재 때문에 떠났던 기억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아 정준을 애써 밀어내는 영옥의 손을 정준은 꼭 잡는다. “누날 안 떠나고 안 보내 난 죽어도. 나한테 이러는 거 반드시 후회할 날 올 거야. 누난 날 너무 하찮고 재수 없게 봤어.” 물론 현실적으로 쉽진 않겠지만 이곳에는 이미 농아인 별이(이소별) 역시 해녀들과 어울려 잘 살아가고 있다. 영희 역시 그 넉넉한 품에 안길 거라는 예감이 드는 대목이다.
수백 마디 말보다 더 우리를 설득시키는 건 어쩌면 그들이 살아왔던 고된 노동 속에서 그 삶의 흔적들이 묻어난 어떤 행동이 아닐까. <우리들의 블루스>가 굳이 제주도에서 시장통에 살아가는 생활력 강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그래서일 게다. 이들의 결코 쉽지 않은 노동의 삶 자체와 거기서 나오는 어떤 투박한 말, 행동이 우리에게 남다른 위로로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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