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가 그리는 우정 판타지, 사랑보다 진하네

[엔터미디어=정덕현] “나도 배신자라, 호식이한테. 갸랑 사귀기도 하고 키스도 하고 막 설레고 그랬는데 어느 날 걔네 집 있는 먼 섬에 가보니 보리농사하는 부모님 뵙고 거동 못하시는 할망 하루방에, 밭일하는 세 여동생까지 보고 배 타고 집으로 오는데 막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자신없더라구. 나 동생도 넷이나 되는데 저 사람들 다 어떻게 먹여 살리나. 사실 나더러 먹여살려달란 소리도 안했는데... 어쨌든 돌무더기 진 것처럼 등짝이 너무 무겁더라구. 그래서 그때 배에서 내리자마자 슈퍼 가 소주 한 병 사서 나발 불고 눈 딱 감고 말했어. 호식아 나 그만 가난하고 싶다. 근데 너랑 살면 계속 가난할 것 같다. 끝내자. 미안하다. 그때 호식이가 아무 말 못하고 나 손잡고 주먹만한 눈물 뚝뚝...”

tvN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목포에 한수(차승원)와 첫사랑 추억여행을 온 은희(이정은)는 케이블카를 타면서 호식(최영준)과 있었던 일들을 털어 놓는다. 호식과 사귀었지만 그 집을 찾아가 가난한 사정을 본 후 마음을 접었다는 은희의 이야기는 짠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가난이 싫고 또 부양해야할 가족들이 어깨를 돌무더기처럼 짓눌렀으면 설레던 마음도 접었겠나. 대신 은희는 어시장에서 칼을 들고 생선 대가리를 쳐가며 억척스레 돈을 벌었고 가족을 부양했다.

그래도 은희에게 남은 건 학창시절 첫사랑이었던 한수와의 풋풋하고 달달했던 시간들의 기억이었다. 그래서 은행 지점장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한수가 여전히 양복 차려 입고 멀쩡한(?) 모습이 은희는 고마웠다. 그 기억을 여전히 지켜주는 듯 싶어서다. 하지만 한수는 그런 멀쩡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문드러져 있었다. 아내를 동반해 딸 골프 유학을 보냈고 그래서 기러기로 살아오며 뒷바라지를 했지만 남은 건 빚뿐이었다. 딸이 더 이상 골프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해도 그는 집착했다. 딸의 포기가 지금껏 뒷바라지로 시간을 보내온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은희에게 오래 전부터 아내와 별거 중이고 이혼 생각도 한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추억여행을 온 한수는 그러나 그런 자신의 처지가 미웠다. 은희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말하려는 자신이. 그건 한수를 보며 여전히 설레어하는 은희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다. 하지만 한수와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명보(김광규)를 통해 한수의 이런 처지와 그 속내를 알게 된 인권(박지환)과 호식은 은희에게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린다.

은희는 배신감을 느낀다. 한수가 그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아줬던 것도, 솜사탕을 들고 가며 어깨에 손을 얹은 것도 그저 우정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다. “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인거? 나 좀 전에 알았네 너 돈 필요한 거.” 고개를 푹 숙인 한수에게 은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와서 꽂힌다. “야 너 나를 뭘로 봐? 너 나를 친구로는 봐 너가 나를 친구로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했어야지게. 이런데 끌고 오지 말고. 잘 사는 마누라랑 별거네 이혼입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너는 나를 친구가 아닌 그냥 너한테 껄떡대는 그런 정신 빠진 푼수로 본거야? 그치 내 감정 막 이용한 거지 그치?”

가난이 싫다며 설렜던 마음을 접고 호식에게 헤어지자 말했던 은희는 이제 돈 때문에 자신의 감정까지 이용하려 한 친구 앞에서 흐느낀다. “난 오늘 지금 평생 친구 하나를 잃었어.” 하지만 한수 역시 나쁜 마음만 있던 건 아니었다. “너한테 왜 처음부터 돈 빌려달란 말을 안했냐고? 세상 재밌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너한테, 매일 죽어라 생선 대가리 치고 돈 벌어서 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는 너한테, 기껏 하나 남아있는 어린 시절 나에 대한 좋은 추억, 돈 얘기로 망쳐놓고 싶지가 않았어. 그래도 그래도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미안하다.”

먼저 방을 나서며 한수가 던진 ‘친구야’라는 말 한 마디가 은희의 가슴을 뒤흔든다. 그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돈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이용하려 했던 한수가 이해된다. 그건 자신 역시 가난이 싫다며 사랑을 버렸던 그 경험과 겹쳐진다. 그렇다고 호식이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계속 전화를 해대고 그런 호식을 꾸짖는 은희지만 이들의 우정은 변함이 없다. 돈 때문에 그런 현실 때문에 흔들리지만 그들은 여전히 친구다.

다음 날 은희는 한수에게 2억을 송금해주며 “장사 밑진 셈 치겠다”고 말하지만, 한수는 다시 그 돈을 되돌려준다. 그것으로 한수와 은희의 우정은 다시 증명된 셈이었다. “살면서 늘 밑지는 장사만 한 너에게 이번만큼은 밑지는 장사 하게 하고 싶지 않다. 니 돈은 다시 보냈어도 니 마음은 다 받았다. 은희야 난 이번 제주생활 진짜 남는 장사였다. 너, 인권이, 호식이, 명보, 추억 속에만 있던 그 많은 친구들을 다시 다 얻었으니.”

<우리들의 블루스>가 담은 은희의 짠한 사랑과 우정은 현실적인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절절하면서도 아름답다. 가난이 싫어 사랑도 외면했던 은희는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됐지만 똑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수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돈을 부쳐주고, 한수는 다시 그 돈을 되돌려줌으로써 우정을 지킨다. 사랑보다 더 진하고 강렬한 <우리들의 블루스>가 담은 우정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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