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뎐’, 한국형 판타지 드라마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순간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tvN 드라마 <구미호뎐>에서 산신 구미호로 활약 중인 배우 이동욱의 작품을 살펴보면 2010년 이후 한국형 판타지물의 계보가 그려진다. 깊게 팬 눈매와 창백한 피부 때문인지 멜로물이나 로맨스물에 주인공급이던 이 배우는 2010년대 판타지 캐릭터 물에서 환영받는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2014년 그의 첫 판타지 데뷔작인 <아이언맨>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동욱은 <아이언맨>에서 게임회사 CEO에 훤칠한 미남인 주인공 주홍빈을 연기했다. 하지만 주홍빈에게는 초능력자라는 사실 말고도 또다른 비밀이 있으니 비가 오는 날 분노하면 몸에서 칼이 돋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주로 상체에만 칼이 돋고 하체 쪽은 없지 않았나 싶다.

<아이언맨>은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아니었다. 배우 이동욱이 슬퍼하다 온몸에 힘을 주고 으흑, 하면 셔츠를 뚫고 칼이 나오는 장면은 사실 좀 웃겼다. 아마도 섬세한 CG가 발달한 시대였다면 아이언맨에 대한 반응은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수분장으로 만든 것 같은 여러 개의 칼을 몸에 달고 뛰는 주홍빈은 캐릭터가 아무리 애절해도 그저 코믹한 분장쇼처럼 보였다. 또한 아이언맨이란 칼이 돋는 판타지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드라마 자체가 이를 제대로 활용하기에 버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주홍빈과 손세동(신세경)이 보여준 진솔한 로맨스 코드는 어설픈 아이언맨의 모습에 묻혀 버렸다.

또한 CG만 어색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시청자들은 아직 한국형 판타지물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후 웹툰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대중들의 한국형 판타지물에 대한 관점도 호의적으로 변해갔다.

그렇기에 2016년 겨울 이동욱이 두 번째 판타지 캐릭터에 도전했을 때의 반응은 <아이언맨>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 작품은 tvN <도깨비>였고 이동욱은 저승사자로 등장한다. 사실 저승사자는 처녀귀신과 함께 한국에서 내내 사랑받은 판타지 캐릭터이기는 했다. 아날로그 시절 <전설의 고향>에서 저승사자는 검은 도포와 찹쌀떡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린 것 같은 허연 분장으로 모두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그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 시청자들은 <전설의 고향>의 저승사자를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시청자들은 21세기 저승사자가 섹시한 로맨틱 가이로 되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이언맨>이 서양 판타지 히어로를 어설프게 따라하다 칼만 돋다 망쳐버린 것과 달리, <도깨비>는 영리하게도 친숙한 판타지 캐릭터를 재창조한 셈이다. 창백한 피부의 이동욱은 허옇게 분칠하지 않아도 시커먼 저승사자 의상과 잘 어울렸다. 더구나 흑립과 도포는 상스럽지만 댄디한 페도라와 검은 슈트로 바뀌었다. 하지만 저승사자 특유의 냉혹한 기운은 그대로 가져갔다.

이 특유의 분위기로 이동욱의 저승사자는 공유의 푸근한 도깨비와는 결이 다른 판타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저승사자가 그려내는 로맨스도 굉장히 잘 살아났다. 사실 김은숙 작가의 특징답게 <도깨비>는 판타지와 로맨스 중에서 비중을 따지자면 로맨스가 더 승한 작품이었다. 로맨스의 세계관 속에 한국형 판타지를 녹여낸 드라마인 것이다.

반면 최근 방영중인 <구미호뎐>은 결이 다르다. 한국형 판타지의 세계관 속에 로맨스가 주요 비중을 차지하는 식이다. 여주인공 남지아(조보아)의 직업이 <도시 괴담을 찾아서>PD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동욱은 이제 <구미호뎐>에서 판타지물 캐릭터에 익숙한 텐션과 분위기를 능숙하게 낼 줄 안다. 그가 연기하는 산신 구미호 이영은 사실 판타지적인 특수효과를 과하게 내지 않는다. 대신 이동욱은 표정과 눈빛의 인간과 사랑에 빠진 구미호라는 설정을 납득하게 만들어준다. 또한 <구미호뎐> 자체가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는 구미호들의 삶과 역사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나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여기에 어둑시니(심소영)와 이무기(이태리) 같은 괴물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현실과 판타지가 그럴싸하게 어우러진다.

이처럼 구미호 캐릭터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한국판 판타지 드라마 <구미호뎐>은 지난 8회와 9회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연, 이연의 동생 이랑(김범), 남지아는 이무기와 어둑시니의 계략에 빠져 무의식의 꿈 세계를 헤매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빠져나가는 과정이 꽤 흥미로웠다. 한국형 판타지 전개와 달달한 로맨스의 정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특히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의 경계를 연결해가며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무의식 세계에 갇힌 남지아가 사랑을 깨닫는 장면이 그러했다.

실종된 가족과의 행복한 가짜세계에 빠진 남지아는 전화벨 소리를 듣는다. 옛날식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자 이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지아는 구미호 이연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점점 그의 잔상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렇게 구미호를 생각해내고 사랑을 깨닫고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전개는 시청자들을 울컥, 하게 만들었다.

사실 <구미호뎐>은 캐릭터 설정은 매력 있지만 은근히 설명이 많고 늘어질 때가 있어 매회 쫀쫀하게 이야기가 재미있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하지만 8회와 9회에 이르러서 <구미호뎐>은 한국형 판타지 드라마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보여준 것만은 확실하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tvN,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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