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삼분지계의 이 달의 생각]
‘운동뚱’, ‘노는언니’, ‘골때녀’가 만든 변화들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의 이달의 생각] ◾편집자 주◾ 21세기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숨가쁘다.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를 다 챙겨보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시대, 당장 눈 앞의 변화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초점을 잃게 된다. 그래서 TV삼분지계는 생각했다. 매주 방영되는 프로그램 리뷰 말고, 보다 더 긴 호흡으로 TV를 곱씹어 볼 수는 없을까? TV삼분지계는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이야기에 얽매이지 않고, 더 긴 호흡으로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TV삼분지계의 이 달의 생각]이다.

2020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여성 선수의 수는 전체 선수단의 약 49%다. 아직 제도적인 측면이나 IOC 위원의 성비까지 함께 살펴보면 남성이 설계하고 주도하는 측면이 강한 경기지만, 그럼에도 여성 선수의 성비가 49%까지 도달했다는 건 유의미한 일이다. 근대올림픽의 출발을 곱씹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피에르 쿠베르텡이 설계했던 첫 근대올림픽에는 여성 선수가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다. 여성의 참가는 물론 관전까지도 엄격하게 금지했던 고대올림픽 정신을 계승한답시고 여성의 참가를 막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승자한테 월계관을 씌워주는 역할 정도가 적합”하다고 믿었던 쿠베르텡의 의도와는 달리, 2회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는 여성 선수의 참가를 허용하라는 목소리가 각계 각층에서 터져나왔고, 결국 IOC는 일부 종목에 한해 여성 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여성이 참가할 수 있는 종목의 수는 아주 느린 속도로 증가했다. 120여년에 걸친 근대올림픽의 역사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역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성에게 그 문호를 개방하지 않던 근대스포츠에 맞서 온 여성 스포츠인들의 역사이기도 한 셈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시도와 발견도 많았던 2020 도쿄올림픽이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점에, [TV삼분지계]는 최근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기반도 더 단단해지고 있는 여성 스포츠 예능들을 돌아봤다. 정석희 평론가는 프로그램에 임하는 출연자들의 진지하고 치열한 태도를 칭찬하며, 도쿄올림픽 중계마다 E채널 <노는 언니>에서 만났던 선수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언급했다. 해설진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발견하고, 뛰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을 확인하는 즐거움 덕분에, 한결 더 애정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평이다.

남지우 평론가는 야구를 사랑했으나 어느 순간 멀어져버린 자신의 일화를 경유해, 여성 스포츠 예능의 존재가 스포츠를 사랑하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스포츠 성평등으로 가는 걸음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승한 평론가는 최근 들어 여성 스포츠 예능이 갑자기 증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스포츠를 향유하는 여성 인구가 이미 많았음에도 젠더적 편견 때문에 그간 미디어가 안 다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번 물꼬가 터져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까 갑작스레 많아 보일 뿐, 스포츠를 즐기는 여성들은 이미 많았다는 평이다. 하긴, 쿠베르텡이 외면했을 뿐,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렸을 때에도 운동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 올림픽 중계에서 아는 선수들을 찾는 재미

세간의 화제 SBS <골 때리는 그녀들>. 이 프로그램이 이처럼 훨훨 날 수 있었던 것은 각 팀 선수들의 열정과 피나는 노력 덕이다. 정규 프로그램으로 돌아오면서 완연히 달라진 선수들의 자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웹예능 <오늘부터 운동뚱>으로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은 먹는 게 아니라 운동이란 걸 비로소 알게 된 김민경. 이번에 영입된 'FC 개벤져스‘ 김민경의 활약이 <골 때리는 그녀들>의 새로운 볼거리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쿄 올림픽 중계로 <골 때리는 그녀들>이 2주째 결방 중이다.

그 아쉬움을 올림픽 중계에서 E채널 <노는 언니> 멤버들을 찾는 재미로 달래본다. 멤버들을 발견하면 내 피붙이를 보기라도 한 양 반갑지 뭔가. 목소리만 들어도 ‘허당 한유미 씨네!’, 반색을 하게 되니까. 박세리 씨는 골프 감독으로, 한유미 씨는 배구, 남현희 씨는 펜싱, 정유인 씨는 수영 해설을 맡고 있는데 1년간의 예능 출연으로 자신감이 붙었는지 차분한 어조, 냉철한 판단력이며 무엇보다 칭찬할 건 콕 집어 칭찬해주는 자세, 그저 흐뭇하다. 뿐만 아니라 <노는 언니>를 통해 소개됐던 각 종목 선수들을 올림픽 무대에서 발견하는 재미도 크다. 거기에 <노는 언니>의 선전 덕에 E채널의 인지도 또한 상승했으니 말 그대로 윈윈이랄 밖에.

 

<노는 언니>가 지난 3일 ‘1주년 단합대회’를 가졌다. 오롯이 여자 운동선수들끼리 화합하고 격려하며 달려온 1년이 아닌가. 초기에 못 미더웠는지 장성규, 유세윤을 진행자로 등장시켰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는데 지금은 옛말이 되었다. 흔히 ‘예능을 예능으로 보지 왜 다큐로 봐?’라고 한다. 예능은 굳이 진지할 필요 없다는 소린데 천만의 말씀, 이제 예능의 흐름은 진정성이 주도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그까이꺼 대충’이 먹히는 세상이 아닌 것이다.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무엇이든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유튜버나 아이돌, 하물며 대통령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싶다 해도 비웃을 사람 하나 없을 10대 시기, 내 꿈은 야구 심판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때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있었고, 중학생이 되던 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개최되며 뜨겁게 달아오른 야구 열기가 내게도 흘러들어온 순간이었다. 여자는 ‘선수’가 될 수 없다는 마음속 판단이 재빠르게 이루어진 대신, 그 옆에 ‘심판’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야구는 워낙 규칙이 복잡하고 영어와 한자어 표현이 교차 범람하는, 올해 기준 KBO 공식 룰북이 220페이지에 달하는 지능과 두뇌의 스포츠가 아니던가. 지금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서 똑똑해지고, 이에 볼과 스트라이크를 잘 구별할 안구 건강까지 지켜낸다면,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리그 최초의 여성 심판이 될 자격을 손에 쥐게 될 것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예상은 했겠지만, 이 이야기는 새드엔딩으로 끝이 났다. 야구의 육체성만큼이나 그것의 두뇌 운동에 매력을 느꼈던 내가 글쓰기라는 두뇌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운은 좋다. 하지만 스포츠라는 꿈을 꺼내 볼 때마다 드는 찜찜함, 혹은 약간의 죄책감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데, 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지금까지 야구와 내가 꾸준히 멀어져야 했던 명백한 이유를 스스로도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20년, 웹예능 <오늘부터 운동뚱>의 방영과 함께 ‘김민경’이라는 희대의 캐릭터가 등장했고, 헬스와 필라테스, 골프와 축구에 도전하는 그녀를 보는 내내 마음이 찌르르했다. 그리고 시작된 야구 편, ‘양신’ 양준혁의 지도를 받아 불과 몇 분 만에 투수 폼과 타자 폼, 포수 폼까지 곧잘 해내는 이 여자의 모습을 보고 나니,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느끼는 멜랑꼴리의 근원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좋아했지만 해보지는 못했던 것, 운동장에서 넘어지고, 뒹굴고, 흙을 뒤집어쓴 적이 없음에서 오는 아쉬움, 억울함, 그리고 부끄러움이었다.

<오늘부터 운동뚱>으로 시작된 여성 스포츠 예능의 유행이 반가운 이유는, 각자의 자리에서 스포츠를 좋아하고 꿈꿔온 소녀들과 여성들이 이와 같은 부끄러움을 이제는 느끼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다. 놀랍게도 2020 도쿄올림픽은 <운동뚱>, <노는 언니>, <골때녀>에서 자라난 마음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 되고 있다. 여자 양궁의 활약엔 각자의 동네에 있는 국궁장에 방문해 볼 것을 권하기도 하고, 여자 배구의 활약엔 서로를 V-리그로 초대해 종목을 계속 사랑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직접 운동을 하는 것도, 종목을 지지하는 것도, 하루 나갔다가 귀찮음에 그만두는 것도, 특정 선수를 ‘덕질’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스포츠 성평등을 둘러싼 한 걸음 한 걸음이다. 거대한 네트워킹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Instagram @jmbar_jwjw

◆ 운동하는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간 왜 안 다뤘던 걸까

최근 지인과 SBS <골 때리는 그녀들> 이야기를 하던 중, 상대의 말에 무릎을 친 일이 있다. “학교 다닐 때에도 여자들은 저렇게 팀 전술이 있고 다 함께 골을 넣으러 가는 그런 종목들은 잘 안 시켰어. 기껏 해야 피구인데, 상대가 공 던지면 그거 안 맞으려고 피하는 것만 바쁜 종목이니까.” 그러게, 남녀공학을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니, 학생 시절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는 종목부터 성별에 따른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남자 아이들은 농구나 축구를 시키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피구를 주로 시켰던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생애 가장 소중한 걸 발견한 듯한 간절함으로 필드 위에서 공을 차는 <골때녀>의 선수들이 더 애틋해졌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여성들이 주도하는 스포츠 예능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코미디TV의 유튜브 오리지널 <오늘부터 운동뚱>부터 E채널 <노는 언니>,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을 필두로, 박세리가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과 함께 기부금을 걸고 라운딩을 하는 JTBC <세리머니 클럽>, 상대적으로 주목은 덜 받고 있지만 여자 사회인 야구를 조명한 MBC 유튜브 오리지널 <마녀들>에 이르기까지, 여성 스포츠 예능의 성장세가 예사롭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여성 스포츠 예능들이 쏟아지는 것을 두고 혹자는 또 “여성 우대의 결과”라고 볼멘 소리를 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 동안 수많은 여성 스포츠 선수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활약해왔고, 생활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여성의 수도 꾸준히 증가해 왔음에도, 젠더적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디어가 그를 충분히 조망하지 않았던 것에 가깝다. 그러다가 한번 물꼬가 터졌으니, 같은 시기에 우르르 쏟아질 수밖에.

어린 시절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자랐는가에 따라, 상상력이 뻗어 나갈 수 있는 범위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체육시간마다 “남자애들은 축구하고, 여자애들은 피구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내 세대와, 김민경이 사격과 킥복싱을 하고 박선영이 필드를 지배하며 <노는언니> 팀들이 여러 종목에서 활약 중인 여성 스포츠 선수들을 만나고 다니는 프로그램을 보며 자라는 지금의 세대의 상상력은 분명 다를 것이다. 10년 뒤, 20년 뒤의 세대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영상·이미지=SBS, KBS, iHQ, 티캐스트.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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